어스름이 지기 시작하면 하루를 마감했다는 사실에 조금씩 마음이 녹는다.
일터에 있을 때는 그래, 별일 없이 지나갔구나.
집에 있을 때는 조금 더 차분해지고 느슨해진다.
녹는 마음에 허기가 뒤따라온다. 위가 보내는 신호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외롭고 쓸쓸해서, 그리고 어둠 속에 더 그러하여 마음이 머리에게, 머리가 위에게 쿡쿡 자극을 주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뭔가 마실 것을 찾는다. 대부분은 술인데 5할은 맥주를, 2할은 소주를, 3할은 와인 정도를 찾는 것 같다. 최근에는 맥주와 소주가 몸을 섞어 만드는 그 맛과 효용에 반해버리고 있다. 오키나와 공항에서 출국 전 사온 시바스 리갈은 아끼고 아꼈으나 입은 기존보다 고급진 것을 많이 낯설어하는 것 같다. 하나를 까면 끝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것만큼은 끝을 보며 마시다가 그날로 골에 갈까 조금 무섭다.
레드는 누구나 알 듯 굉장히 매력적인 색이다. 나는 포인트가 되는 그 색이 섞여 있는 몇몇의 것들을 매우 좋아한다. 장미처럼 온갖 붉은 것이 아니라, 머리가 짙게 검은 한 여인의 붉은 립처럼 매혹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한다. 푸른 잎 사이의 빠알간 열매처럼 맺힌 것을 좋아하고, 흑갈색 커피가 흰 우유 이불을 덮었는데 은은한 스탠드 불빛처럼 뿌려 흩어진 버건디의 토핑에 반한다. 향과 맛의 매칭이 약간 어긋나 있는 루이보스티와 하얀 접시 위의 꼭지 딴 딸기가 보기 좋다.
레드는 열정적이다. 달려들게 만들고 싶은 색이다. 향기로운 색이기도 하고 나를 적극적으로 만든다.
붉은색 와인이 유리잔에서 찰랑거리고 다음날 입술에 남아있는 검붉은 자국에, 또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은 어지러운 나를 본다. 거울 속 초라한 여인은 어제 와인병을 비우고 울음을 토해낸 그 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