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iss Dec 12. 2017

RED

어스름이 지기 시작하면 하루를 마감했다는 사실에 조금씩 마음이 녹는다.

일터에 있을 때는 그래, 별일 없이 지나갔구나.

집에 있을 때는 조금 더 차분해지고 느슨해진다. 

녹는 마음에 허기가 뒤따라온다. 위가 보내는 신호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외롭고 쓸쓸해서, 그리고 어둠 속에 더 그러하여 마음이 머리에게, 머리가 위에게 쿡쿡 자극을 주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뭔가 마실 것을 찾는다. 대부분은 술인데 5할은 맥주를, 2할은 소주를, 3할은 와인 정도를 찾는 것 같다. 최근에는 맥주와 소주가 몸을 섞어 만드는 그 맛과 효용에 반해버리고 있다. 오키나와 공항에서 출국 전 사온 시바스 리갈은 아끼고 아꼈으나 입은 기존보다 고급진 것을 많이 낯설어하는 것 같다. 하나를 까면 끝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것만큼은 끝을 보며 마시다가 그날로 골에 갈까 조금 무섭다.  


레드는 누구나 알 듯 굉장히 매력적인 색이다. 나는 포인트가 되는 그 색이 섞여 있는 몇몇의 것들을 매우 좋아한다. 장미처럼 온갖 붉은 것이 아니라, 머리가 짙게 검은 한 여인의 붉은 립처럼 매혹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한다. 푸른 잎 사이의 빠알간 열매처럼 맺힌 것을 좋아하고, 흑갈색 커피가 흰 우유 이불을 덮었는데 은은한 스탠드 불빛처럼 뿌려 흩어진 버건디의 토핑에 반한다. 향과 맛의 매칭이 약간 어긋나 있는 루이보스티와 하얀 접시 위의 꼭지 딴 딸기가 보기 좋다. 


레드는 열정적이다. 달려들게 만들고 싶은 색이다. 향기로운 색이기도 하고 나를 적극적으로 만든다. 

붉은색 와인이 유리잔에서 찰랑거리고 다음날 입술에 남아있는 검붉은 자국에, 또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은 어지러운 나를 본다. 거울 속 초라한 여인은 어제 와인병을 비우고 울음을 토해낸 그 미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과자종합선물세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