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의 수치

나는 정말 다정한 사람일까

by Aria mind




“그럼 이건 이렇게 하면 되나요?”


“네. 안되시면 다시 사셔야 돼요.”


“….”


최근 전자제품을 쓰다가 되질 않아 AS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응당 제품 구매자였지만, 내가 기기를 잘 못 다루는 것 같아 내심 미안한 마음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봤는데 잘 안돼서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위와 같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향초를 켜는 캔들라이터에 가스가 떨어져 편의점에 갔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요즘 라이터는 어떤게 나오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귀찮다는 듯 “다 비슷해요.” 하고 한숨을 푹 쉬는 편의점 알바생.

멋쩍게 고르고 나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요즘 사람들은 다정하지 않을까.


다정함이라는 말이 맞을지 모르지만,

요즘은 판매나 서비스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 자체가 예전보다 낮아진 느낌이다.

백화점이나 고급 브랜드 매장이 아닌 이상, 예전처럼 세심한 서비스의 퀄리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걸까. 이시대에 맞는 다정함은 조금 더 차가운 느낌인 건가.


어느날,

급하게 다음날 머리를 다듬으러 동네 미용실에 들어갔다.

이것저것 물어보던 디자이너는 처음엔 머리에 관한 질문을 하다가,

점점 어디 사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어떤 운동을 하느냐 등 사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하… 일대일로 앉아 있는 상황에서 머리 해주는 사람에게 대화거부를 요청할 수도 없고

어쩌지. 그리고는 생각했다.


' 아, 다음에 여기는 못오겠다. '


예전에 네일샵 인터넷 예약 체크란 리스트에

“대화 없이 받고 싶어요.“라는 옵션을 본 적이 있다.

' 뭐 얼마나 말을 시키길래 이런옵션이 있지?' 라고 피식 웃으며 넘겼었는데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나 싶었다.




프리랜서 파견 강사인 나는 요즘 주 고객층이 시니어라 7090대 분들과 마주할 일이 많다.

어르신들은 어찌나 챙겨주시고 예뻐해 주시는지.. 최고령 고객층이 6070대였던 나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자, 고전적인 정과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일할 맛도 나고 즐거움도 컸다.

그러다 보니 요즘 느끼는 점이 있다.

혼자 지내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 운동보다 대화를 더 원하신다는 것이다. 젊었을 적 추억부터 동네 소식까지,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처음에는 흥미롭고 재미있게 청취자가 되었다.

그 따뜻함이 고맙지만, 솔직히 다음 수업 시간이 다가오면 ‘어쩌지…’ 하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챙겨주시는 정성 덕분에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내 페이스를 지키는 건 체력적으로 쉽지 않았다.

.

.




이런 일들이 다양하게 일어나는 요즘,

과연 나는 그들에게 다정함을 주고 있는가.

한번 곱씹어볼 일이었다.


나는 극 I 90%인 사회형 강사다.

누구도 나를 내향형으로 본 적이 없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회원이나 주변 사람들은 거짓말하지 말라며 의심한다. 이 정도면 상당히 연기화된 진화형인데, 그래서인지 나는 나름 오해도 많이 받고, 친근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강사지만 누구보다 고요를 사랑하는 1인. 사람이 많은 공간에 가면 심지어 공황증상도 가끔와서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이런 내가 과연 상대에게 바라는 다정함이 큰 걸까.

아니면 다정함이란 정말 얻기 어려운 희소 가치일까.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나도 냉정해질 때가 있었다.

나의 다정함을 상대가 귀찮음, 혹은 하나의 지나가는 별 볼일 없는 가치로 여길 때가 있었다.


노동청의

“그냥 그런 건 대충 넘어가죠.”


긴 이야기를 줄이면, 결국 민원인의 간절함을

하나의 일로만 다루는 그들에게 나의 스위치는 켜졌다.

“아, 그냥 아무 조사나 과정 설명도 없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이런 일은 대부분…”

“그럼 제가 여기까지 왜 찾아왔겠어요. 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치부하시나요?

다른 분이랑 상의 하고 싶습니다.”


그제서야 적극적으로 나서는 공무원.

왜 사람들은 공격적인 사람에게만 다정할까. 철저하게 자기 손해가 생길 상황에서만

다정과 관심을 빙자한 도움을 제공할까.

성난 이빨을 드러내는 사람에게만 공손해진다면, 나도 누구보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낼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상대의 다정함을 얻기위해 내 다정함을 쓰고 싶지 않아서다.


그저, 기본적으로 다정함을 가진 사람이고 싶었다.


그럼 나는 어르신들이나 미용실 디자이너의 다정함을 어디까지 받아들였어야 했을까.

나는 과하지 않은 따뜻한 온도를 바랄 뿐인데, 요즘엔 그런 온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작은 다정함도 불편으로 느껴진다면 오지랖이 되는 걸까.


다정함을 다정함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따뜻한 온도를 건네야 하는 세상.



내 다정함의 온도가 냉정함으로 색을 잃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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