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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아리아 Jan 06. 2024

피아니스트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를 보고..

빛나는 것은

악보인가?

건반인가?

그의 머리칼인가?

그의 손인가?


늘어진 것은

음정인가?

그의 살가죽인가?

세월인가?

예술인가?


울리는 것은

피아노의 본체인가?

피아니스트의 육체인가?

극장 안 공기인가?

나의 마음인가?


환한 빛이 그를 감싸지만

검은색 수트를 입은 피아니스트는

어둠 속 그림자일 뿐.


모든 것들이 담긴 그의 안경알이 반짝인다.

그러나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은 피아니스트의 눈동자는 새까맣다.


피아니스트는 그저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는 그냥 앉아 있지 않다.

조용히 앉아 있다.

피아니스트는 그저 무거운 손끝을 피아노에 가볍게 올릴 뿐이다.

가벼운 침묵을 무겁게 울릴 뿐이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울리지만

피아니스트는 울지 않는다.

피아니스트는 악을 위해 입을 다문다.

피아니스트는 음을 위해 숨을 죽인다.

피아니스트는 숨을 멈추고 음을 살린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나도 울린다.




늘 피아노를 울리며

나를 울리던 류이치 사카모토는 오늘도 나를 울렸다.


재작년 암투병 마지막 콘서트 소식으로 나를 울리더니,

작년 시작부터 마지막 앨범으로

봄에는 이승의 작별 소식으로

사후 여름엔 마지막 장례 곡들로

가을엔 마지막에 영화 참여 소식으로

작년 겨울엔 마지막 공연 실황 다큐 개봉 소식으로

연말엔 새해 당첨 티켓 소식으로 나를 울리더니


올해 시작하자마자

 그 마지막 공연 감상으로 또 나를 펑펑 울렸다.


흑백으로 담긴 그의 생애 마지막 연주 공연을 보는데

계속 시 한 구절이 맴돌았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낙화, 이형기-


그리고 갑자기 드로잉이 너무 하고 싶어졌다.

나는 내 안에 울음이 가득 차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는거 같다.

때문에 내가 그린 그림 중에서

눈물 없는 그림은 없다.

그럼에도 이제 인간은 그리지 않겠다 했는데..

마치 살아 있는 추상회화 같았다고 할까나..


우주 모든 존재들이 다들 저렇게 시커먼 무대에서

자기만의 소리를 내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 하고 있겠구나.. 싶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 모습을 보는데,

그 자체가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느낌이자,

요근래 처음으로

인간이 멋진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가히 숨을 쉴때도 숨을 멎어서도 저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존재란..

그리고 처음으로 세월이, 주름이, 나이가 의미있게 느껴졌다.

그 멜로디를 구성하는 음 하나하나가 소중하듯

그를 구성하는 원자 하나하나가 다 그렇게 소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 스킬로 보자면 그 다지 좋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으로도 손이 떨리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내겐 최고의 공연이었다.

음악은 힘이 스킬이 전부가 아님을

병마와 싸우며 노쇠하여 흔들리는 연주에서..

죽음을 앞둔 그의 공연을 보며..

그가 사라진 피아노 연주를 보며..

확실히 깨달았다.


여하튼 성치 않으신 컨디션으로도

내가 듣고 싶었던 곡들 연주를

너무나 생생하게 들려주고 보여준

류이치 사카모토,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떠난지 1년이 되어 가지만

올 해도 여전히 그의 명복을 빈다.

R.I.P, Ryuichi sakamoto


다큐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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