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Wellnessmate 열흘살기
구형왕릉, 국가사적 제214호로 700만 가락국후손들의 거룩한 성지!
산청에는 꼭 보아야 할 9경이 있는데 그중에 4경이 구형왕릉이다.
이름도 생소한 구형왕은 가야의 10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을 가리킨다. 구형왕은 구해 또는 양왕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라고 한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가야국의 왕으로 있었다.
구형왕릉은 왕릉 주변으로 등나무와 칡넝쿨이 뻗지 못하고 까마귀와 참새도 왕릉 위를 날지 않으며, 이끼나 풀도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 신비함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신기하기도 하고 정말인가 싶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구형왕릉이 있는 왕산 자락을 타고 올라가니 주차장이 나왔다. 주차장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고 주차하기 편했다. 조금 걸어서 올라가니 홍살문과 더불어 구형왕릉이 보이기 시작했다. 홍살문을 지나니...홍살문이 정말 많이 낡았다. 멀리서 두 분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게 보였다. 잠시 기다렸다고 올라가본다.
경주에서 본 많은 왕릉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돌들이 쌓여져 있는 피라미드형식의 무덤이었다. 아, 우리나라에도 이런 형식의 무덤이 있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 하지만 첫 느낌은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좀 허름하고 소외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니 일단 무덤이 돌로 쌓여져 있고 주변이 휑한 느낌이라 그런 듯 했다. 기도를 드리고 있는 분은 한참을 고개 숙여 참배하고 계셨다.
구형왕릉은 피라미드형 7단으로 되어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적석총이라고 한다. 일반 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었다. 앞에서 보면 7단인데 뒷면은 산의 비탈진 경사를 이용했기 때문에 평지에 지어진 피라미드식 층계를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는 왕릉의 위 쪽을 볼수가 없었는데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무덤의 위쪽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왕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양 옆에 꽃들이 있다. 단아하고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었는데 흐른 날씨 탓인지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왕릉 위로 새도 날지 않고 이끼나 풀도 자라지 않는다는 전설같은 말을 먼저 들어서인지 굉장히 행동에 조심하고 예를 갖춰야만 한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는 국가사적 제 214호, 700만 가락후손들의 성지라는 곳이다.
왕은 왜 자신의 무덤을 돌로 짓게 하였을까?
금관가야의 구형왕은 집권 11만에 신라에 영토를 넘겨주며 양위하게 된 후 현재의 산청군 금서면 특리에 있는 왕산에서 5년간 은거하다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구형왕은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나 흙이 아닌 돌무덤을 쓰라고 유언했다고 하니 남은 세월 얼마나 비통하게 살았을지 짐작이 간다.
스스로를 신라에 항복하여 나라를 넘겼다고 해서 양왕(讓王)이라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군을 이끌고 온 신라 법흥왕에 맞서 싸우기에는 군사력이 크게 차이가 나서 항복을 했다고 전해진다. 법흥왕은 가야국의 백성을 신라의 양인으로 받아주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가야 왕족에게는 신라 진골로 편입하여 귀족 대우를 해주었으며, 가야의 왕에게도 금관국을 식읍으로 주고 다스리게 하였는데 구형왕은 이를 다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 한것이 구형왕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이자 신라 문무왕은 구형왕의 5대 외손이라는 사실! 통일 신라를 이루는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운 위인들이 구형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참 얄궂은 역사 이야기다.
구형왕릉에서 조금 내려오면 동의보감 류의태 약수터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만약 차로 올라갈 계획이라면 주차장에 차를 세우지 말고 올라갈 수 있다. 길이 매우 구불거린다는 글을 읽은 거 같다. ㅎㅎ
구형왕릉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곳이다. 그 당시에는 서로 다른 나라로 살고 있던 이곳이 이제 한 나라가 되어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 일수도....나라를 내어놓고 시름에 빠진 구형왕이 지금 한 나라로 잘 살고 있는 우리들을 본다면....기나 긴 역사를 거듭하고 지금의 현재가 되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며 구형왕릉이 많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