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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나라 Jul 01. 2024

“학문은 실천을 통하여 그 빛을 발한다” 남명 조식

산청 Wellnessmate 열흘살기

가난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스스로 도(道)를 즐겼다. 항상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는데 이 칼끝은 스스로를 겨누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에 대해 가장 엄격했다. 또 허리춤에는 방울을 달고 다녔다. 집안을 거닐 때도 지리산에 오를 때도 그 종은 함께 했다. 종소리는 걸을 때마다 울려 그 스스로를 일깨우는 소리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의병장들이 스승이었던 분.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은 내가 잠시 머무르고 있는 산청읍과는 확연히 다르다.

산청읍에서는 꽃봉산, 필봉산, 왕산 등등에 가려 지리산이 잘 조망되지 않으나, 시천면에서는 어디서든 지리산 자락을 만날 수 있다.

눈을 들어 저 멀리 바라보면 지리산 천왕봉이 자리잡고 있고, 아래로는 지리산의 위엄을 담아내는 덕천강이 흐른다. 비로서 산청군을 품어내는 지리산을 만날 수 있는 곳. 그곳에 남명 조식 기념관과 산천재가 자리잡고 있었다.


남명 조식, 그는 누구인가?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의병장들이 스승이었던 분.
조선 13,14대 임금 명종과 선조의 끊임없는 부름에도 관직에 나아가기를 거절하고 초야에 몸 담은 조선의 유학자.
퇴계 이황과 동갑이면서 서신을 통해 교유하기도 했으나, 현실에 쓸 수 없는 학문은 버려야 한다며 퇴계 이황과는 다른 길을 제시한 학문적 거장
이런 분이 남명 조식 선생이다.


남명 조식 기념관은 남명 조식의 탄생 500주년을 맞은 2001년 설립을 추진해 2004년 8월에 문을 열였다. 남명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유품과 관련 자료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넓다란 공간에 옥돌로 만들어남명 조식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갓을 쓴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의 선비였다.


조식 기념관 앞 벽화
조식 기념관에 있는 조식 동상


남명 조식은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급제를 하여 한양으로 올라가 살았으나 열 아홉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작은 집 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된 사화의 참상을 지켜보면서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된다. 관직을 얻어 출세하는데 목표를 두는 과거 공부를 버리고 인격 완성이라는 학문 본연의 목표에 부합하는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가문의 재건을 원하는 어머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과거 공부를 포기한 것이다.


너무 멋진 선택이었고 누구나 할 수 없는 선택을 한 훌륭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 상황과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가슴이 무너지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자식이 취직을 포기하고 스스로 인격을 완성하는 학문에만 정진하겠다고 하면......부모님들의 마음은 어떨런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부유한 처가가 있는 김해로 옮기게 된다. 이곳에서 산해정을 지어 인격수양을 하였다. 이곳에서 남명의 기상은 "가을 날 서릿발 같고 여름의 뜨거운 태양 같으며 천길 낭떠리지 같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명은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정치에는 무관심하지 않았다. 명종의 부름을 거절하며 올린 ‘단성소’라는 사직 상소에서는 타락한 권력과 정치의 부패를 적나라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경의검(좌), 성성자(우)

 

"방울 소리로 나를 일깨우고 품에 품은 칼로 나를 겨누네"

전시관에는 흥미로운 유물들이 많았다. 바로 '경의검'과 '성성자'인데 쉽게 말하는 단검과 방울이다.

항상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는데 이 칼끝은 스스로를 겨누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에 대해 가장 엄격했다. 또 허리춤에는 방울을 달고 다녔는데, 집안을 거닐 때도 지리산에 오를 때도 그 종은 함께 했다. 종소리는 걸을 때마다 울려 그 스스로를 일깨우는 소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칼과 방울이 아직 남아 있다니 신기했다.


임진왜란, 남명의 제자들이 나라를 구하다

남명은 학문은 세상을 조감하고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을 기로는 일이며 실천이 뛰따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내 한 몸, 내 가정의 안위보다는 국가의 위기에 앞장서는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남명이 있던 경상우도였으며 의병장 중에는 남명의 제자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남명 학맥도

남명 기념관에서 만나게 된 이 남명 학맥도가 신기하여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자세하게 이름까지 다 적혀있는지....

마치 남명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정리했는지...정말 감탄하게 되었다.


전시실에는 이외에도 남명집 등의 남명이 지은 수필집, 서실들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모두 다 남명의 일생과 생각을 들여다볼수 있는 자료이며, 1500년대와 현재를 이어지는 징검다리이기도 했다.


남명기념관을 나와 산천재로 가려면 2차선 도로를 건너야 한다.

산천재는 남명 조식 선생이 61세때 이곳 산청으로 와서 후학을 양성하고자 지었다고 한다.

실제 가보니 작은 건물이다.

산천재 앞에는 남명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매화나무가 있었다. 남명 선생은 갔지만 매화나무는 아직도 꽃을 피운다고 한다. 이 매화는 남명매로 산청의 3대 매화나무 중 하나이다.


이곳은 정말 지리산 조망이 기가막히다. 탁 트인 공간에 지리산


산천재와 매화나무

남명은 제자들에게 “경(敬)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서 실천하라.”고 가르쳤으며, 또한 그가 제자들에게 특히 강조한 것은 한 자기 절제를 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절개와 의리였다고 한다.

당시 경상우도 학문의 메카였던 이곳에서 남명 조식은 72세의 나이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생을 마감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산천재를 나오면 남명이 죽은 후 선조가 내린 제문을 새겨 세운 비석을 볼 수 있다.

남명매와 지리산
선조가 내린 제문을 새긴 비석cㅓ


또한 선조 9년에 남명이 돌아가신지 4년후에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덕천서원'이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서원안에는 강당인 경의당과 사당인 숭덕당이 있다.

덕천서원은 산천재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 지리산 바람을 맞으며 차로 조금 달리다 보면 금방 만난다.

덕천서원은 생각보다 많이 낡아 있었고 활기가 부족한 듯 보였다.

덕천서원 입구에는 우뚝 솟은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덕천서원이 세워질 때 심었다고 전해오는 나무로 수령은 450년이 넘는다고 한다. 가을에 온다면 더욱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덕천서원


조선시대 영남학파를 형성하고 남명학파를 이루어가며 학문의 완성을 추구했던 한 시대의 위대한 학자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들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수능 1등, 사시 1등(지금은 없어졌지만), 로스쿨 수석 졸업 등 1등 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현 시대에서 바라보면, 장원 급제도 아니고 초시에 합격하고 재시에 실패한 후 초야에 묻혀 훌륭한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여 인격의 완성 뿐 아니라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실현한 후세까지 존경받는 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하다.

'실천'을 강조한 그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위대한 교육자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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