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마애삼존불 & 보원사지, 서산 일주일 살기
서산 시내를 벗어나 20여분을 달려 가야산 자락으로 향한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달리며 창문을 여니 숲속의 청정한 공기가 온 몸으로 느껴진다.
바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그저 맑기만 하다.
오늘 만나고자 하는 곳은 천 년 넘게 이 땅을 지켜온 두 개의 소중한 문화재, 서산 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다.
아직도 여전히 봄이라 나뭇잎들은 또 어찌나 싱그럽고 연두,초록하는지....너무 좋다!
그나저나 이 청정하고 향긋한 공기, 매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도착한 용현리 가야산 기슭,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을 보려면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한다.
그저 십 분 남짓이지만 시작부터 엄청난 계단이다. 주변의 분위기는 고즈넉하고 정말 잠깐 올라온 것인데도 깊은 숲속에 들어온 듯 적막 그 자체.
심호흡을 여러 번....힘들어서가 아니라 공기가 너무 좋아서....^^
아무리 힘든 계단이라도 끝은 있는 법! 오래 올라가지는 않으나 그래도 땀은 좀 나는 편이다.
이제 좀 힘든가 싶으면 어느덧 딱! 그분들의 미소가 나를 반긴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높이 2.8미터의 거대한 화강암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가운데 본존불이 바로 그 유명한 '백제의 미소'를 보여주는 부처님이다. 가끔씩 다양한 사찰들에서 만나게 되는 부처님상은 눈꼬리가 올라간 것도 있고 살짝 엄한 기운이 느껴지는 부처님상도 있었는데, 서산 마애삼존불은 온화하면서도 자애로운 표정,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서 느껴지는 웃음에 가까운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뜻함과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마애삼존불이 만들어진 시기는 백제 후기 6세기 후반 추정된다고 한다. 백제 후기는 웅진(현재 공주)나 사비(현재 부여)에서 수도가 있던 시기이다. 백제는 일본과 활발한 교류, 중국 남조의 문물 수용 등을 통해 불교예술이 화려하게 발전했으며 그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 마애삼존불이라고 한다.
마애불은 사찰안의 불상이 아닌 야외 바위에 조각된 불상으로 자연과 신앙의 융합을 보여주기도 하며, 사방을 비추는 자비의 상징이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또한 석가여래가 중심에 있고 양쪽 보살로 되어 있는 삼존불 형식 자체가 중생을 교화하고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
우리나라 국보 제84호에 빛나는, 세련된 조각기법으로 당시 백제 불교 미술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는 마애삼존불. 천 년 전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와 이렇게 백제의 미소, 자비로운 미소를 보고 갔겠지?
서산 마애삼존불은 한 박물관장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분은 1959년 당시 한 나무꾼으로부터 가야산 계곡 깊숙한 곳에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이 제보를 바탕으로 현장조사에 나셨고 마침내 서산 마애삼존불이 천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는 것.
그럼 조선이 억불정책으로 백제에 의해 사랑받던 마애삼존불이 깊은 숲속에 벼러지고 잊혀져있었던 걸까하는 의문이 든다.
마애삼존불은 오전 시간대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서쪽을 향한 불상의 얼굴에 햇살이 비칠 때 그 미소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햇살이 환히 비추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마침 날씨가 흐려 볼 수가 없었다. 마애삼존불을 만나고 내려오면 슈퍼와 용현집이라는 식당을 만날 수 있는데 용현계곡 옆에 깔끔하게 자리를 잡아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아도 음식을 먹고 싶게 만든다. 이 식당은 어탕국수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1인분은 팔지를 않아 맛을 보지 못했다. 1인분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수제 돈까스 뿐.
마애삼존불과 멀지 않은 곳에 보원사지가 있다. 물 맑은 계곡길을 따라 구불구불 가면 보원사지가 나온다.
보원사지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터로,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십찰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의상 스님이 전교했던 이곳은 한때 백 개의 암자와 천 명의 스님이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진짜 엄청난 규모를 받는 주목받는 사찰이었을 것 같다. 천 명의 스님이라니!
하지만 지금은 다 사라지고 절터만 남았다.
현재는 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04호), 석조(보물 제102호), 당간지주, 부도, 불상 등의 유물이 남아 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와 위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보원사가 위치한 내포 지역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 에서 "충청도에서 내포가 가장 좋다"라고 극찬한 곳이라고 한다. 그는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해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라고 묘사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보원사는 중국 문물이 백제로 유입되는 중요한 경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직접 눈으로 보니 넓다란 부지가 네모 반듯하고 평평하다. 절터만 봤을때도 규모가 상당하다.
아직 초록에 이르지 못한 연두의 이쁨이 남아있는 풀밭을 지나 저멀리 오층석탑이 보인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보원사 터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오층석탑인데 백제와 통일신라 양식을 잘 계승했다고 한다. 상하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몸돌과 지붕들을 올리고 정상에 머리장식이 있는 구조이다. 이 오층석탑의 지붕들이 얇고 넓어 원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네 모서리 끝이 살짝 들린것이 바로 옛 백제지역에 남아있는 백제탑의 특징이라는 것.
보원사지 오층석탑 뒤로는 법인국사탑과 법인국사탑비가 놓여 있었다. 단을 쌓아올려 오층석탑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다보니 전망도 더 좋고 살짝이긴하지만 내려다보는 맛이 있다.
법인국사탑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화엄종 승려인 탄문의 승탑이라고 한다. 승려 최고의 지위인 왕사와 국사를 지내다가 이곳 보원사에 내려와 지내다가 3개월만에 입적하였다. 고려 왕실은 국가 최고의 장인을 보내 승탑과 탑비를 세우게 하였다고 하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고려왕실의 최고 장인의 솜씨인 것이다.
승탑은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으로 사리탑, 부도, 묘탑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처음 들어설때 부터 느낀건데 기분 좋은 꽃내음같은 것이 훅~하고 계속 코 끝을 간지른다.
꽃은 없는데...도대체 어디서 나는걸까 싶었는데, 법인국사탑에서 내려다보니 토끼풀 꽃이 하얗게 초록을 삐집고 만발하고 있었다. 혹시 토끼풀 꽃에서도 향이 나는 걸까? ㅎㅎ
지금은 절터만 남았지만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고려 시대 불교의 융성과 함께, 이곳이 중요한 불교 수행과 교학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서산 일대가 단순한 지방이 아닌 불교와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보원사지는 지금도 산에 둘러쌓인 아늑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 학술적 가치 외에도 명상과 사색의 공간으로, 일상의 번잡함을 벗어난 힐링의 공간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이러니하게도 절터만 남아 있는 빈 공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듯 하다.
경주의 감은사지와 더불어 언제든 다시 오고 싶은 공간으로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는 백제에서 고려까지 이어지는 불교 신앙의 흐름과 그 속에서 발전한 조각, 건축 예술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여정이었다.
현재도 지속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보원사지와 마애삼존불은 서로 다른 시대의 산물이지만 인연이 깊다. 위치도 가까울 뿐더러 보원사지를 발굴하는 와중에 서산마애삼존불을 찾게 되었다고 하니,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느낌이 든다. 둘 중의 한곳만 봤다면 무언가 부족할 듯. 둘을 모두 봐야 서산여행이 완성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누가 뭐래도 두 유적지 모두 이 서산지역이 불교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천년의 시간을 품은 시대를 초월한 만남(보원사지와 마애삼존불)을, 현대를 사는 우리가 또 만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로 이어지는 시간여행, 떠나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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