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좀 뽑아라
친정에서 9시쯤 출발해 집에 도착하니 정오였다.
친정에서 가져온 복숭아를 가져다 드리고
아이 얼굴도 보여드릴 겸 시댁에 갔다.
"흰머리 좀 뽑아라"
앗, 오자마자 흰머리를 뽑게 될 줄이야.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 족집게를 가져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집에 돌아가면, 늦은 점심을 배달시켜 먹고 짐정리를 한 후 세탁기를 돌리고 욕실청소까지 해버리려던 계획은 포기해 버렸다.
이대로 흰머리를 뽑다가 저녁까지 먹고 가게 생긴 판이다. 역시나 짬뽕을 시켜서 저녁을 먹고 가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런데 그는 왜 집에 가야겠다고 말하지 않는 걸까?
분명 말할 타이밍이 있었는데 이럴 걸 예상했던 걸까?
나만 잠깐 왔다 가려고 한 건가?
그나저나 나는 왜 거절을 못하는 거지.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씀이 많으셨나 보다. 옛날얘기를 듣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다. 응?
그리고 흰머리 뽑는 것도 너무 재미있다. 잉?
그러니 이런 생각이 스치는 거다.
그래, 요리 안 하시는 게 어디야.
수그리고 앉아 흰머리만 뽑다가 짬뽕 먹고 가면
편하지 뭐
사실 나는,
감자 깎기보다 훨씬 먼저
흰머리 뽑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용히는 정말 흰머리를 잘 뽑는구나."
옆집 할머니의 칭찬이었다. 흰머리를 뽑아드리면 용돈도 주셨다. 흰머리 뽑기를 정말 좋아했다. 그 한가닥한가닥 뽑을 때의 그 쾌, 쾌, 시원함...
옆집 할머니가 이사를 가시며 봉인할 수밖에 없었던 능력이지만, 결혼을 하고서 드디어 해제시킬 기회가 온 것이었다.
"제가 뽑아드릴게요!"
어머님이 아가씨에게 지시하신 것을 내가 가로챘다.
그렇게 어머니도 나의 흰머리 뽑기 실력에 중독되어 가셨다.
명절연휴, 시누이네와 밥을 먹어야 하니
260km 떨어진 친정에 갔다가 잠만 자고 올라오라던
어머님의 말씀대로 한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흰머리 좀 뽑아라"
내가 힘들어 보였는지, 아가씨가 나섰다.
"엄마, 내가 뽑아줄게"
"아니, 넌 안돼. 조용히가 잘 뽑아"
며느리의 능력을 인정받은 듯한 저 말씀에 기분이 좋았던 건 비밀이다. 그러나 10년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다.
3년 6개월은 매주, 6년 4개월은 격주, 가족모임 후, 명절 후, 여행지에서까지 2시간에서 3시간 가까이 뽑았다. 여행을 갈 때 족집게를 가져가지 말라는 사촌형님의 조언이 있은 날엔, 어머님이 챙겨 오셨다. 나라고 늘 흰머리를 뽑는 것이 재미만 있었던 건 아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했다.
흰머리를 뽑아주는 샵을 열면 어떨까.
이 머리카락을 개당 10원씩 받는다면 비싼 건가.
받을 수만 있다면 부자가 될 텐데.
하지만 어머니에게 돈을 요구할 순 없었다.
대신 어머니는,
내 딸에게 머리숱부자 유전자를 물려주셨다.
남편이 받았으면 참 좋았을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