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포노 사피엔스의 사랑법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어쩌다 딸의 손을 잡았다.
(중학생 딸과 손잡는 건 아주 귀한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말했다.
“잠깐! 나 아직 샤워 안 했는데?”
“이잉?”
“아직 신성한 기운이 남아 있단 말이야.”
말인즉슨, 학교에서 남자 친구와 손을 잡았고,
그 기운이 아직 손에 남아 있으니 엄마랑 손을 잡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헐!
며칠 후, 잘 빗지도 않는 딸의 푸석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고개를 쭉 빼며 딸이 하는 말!
“머리도 신성하거든!”
풉! 그래, 이해한다! 귀여운 것들!
딸아이를 꼬드겨 와인을 사러 갔어요.
안주로 치즈와 포도와 칩을 준비하고 와인을 땄지요.
딸아이도 기분 좋게 앞에 앉아 있겠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자, 오랜만에 엄마랑 남자 친구 이야기 좀 해볼까요? 음, 가장 기억에 남는 남자 친구는 누구입니까?”
“가장 최근에 사귀었던 애.” (그놈의 자식. 안 좋게 헤어졌어요. 그놈 때문에 많이 울었죠.)
“첫 번째 남자 친구 아니고요?” (오래전 초등학생 때의 풋사랑이었죠.)
“걘! 그냥 애들이 자꾸 놀리니까 우리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던 거지!”
“아, 그렇군요. 그럼 두 번째는?”
“걔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고.” (네, 맞아요. 두 번째는 엄마가 옆에서 보기에도 그랬어요.)
“자, 그럼 지금은 남자 친구가 없군요. 좋아하는 남자는 있어요?”
“당연하죠!”
“오, 이름은?”
“ *** ” (아이가 새 학교로 전학 가서 가장 먼저 마음에 들어했던 친구였어요. 역시 첫눈에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 오래가는군요.)
“그럼 어떻게 할 건가요? 사귀고 싶어요?”
“몰라,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어떤 준비요?”
“아, 사귀기까지 가는 그 과정이 있잖아요. 그게 귀찮아요.
대화하는 것도. 게을러서 그래요. 그리고 나한테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나를 챙기는 것!
음식! (음식이 두 번째라니!)
내 전화기! (당연하지)
내 절친! (아직은 남자 친구보다 절친이구나!)
가족! (가족도 끼워주니 황송한걸?)
공부! (올, 철 좀 들었군.)
아, 그리고 내 아이돌! (그래, 인정! 우리는 함께 방탄소년단 아미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가장 먼저 나온 ‘나를 챙기는 것!’을 듣고 이미 기분이 업되었습니다.
남자 친구도 좋고 중요하지만, 나를 먼저 챙길 줄 아는 아이로 키웠다는 자부심이 뿜 뿜 했지요.
다음 말은 솔직히 귀에도 잘 안 들어왔어요.
사귈 때는 사귀고 쉴 때는 열심히 자신을 돌보는 것, 아주 바람직합니다.
“그럼 *** 말고 ###는 어때? 걔랑도 친하지 않아?”
“아, 걔는 괜찮은데,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어.”
“어떤 문제가 있는데?”
“텍스트 스타일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엥? 어떤 스타일?”
“haha 이런 거! 그리고 이런 거. ^^ 이런 거 쓰면 정말 꽝이야! 절대 안 돼! 대답도 ㅇㅇ 너무 성의 없어서 안 되고. ㅋㅋ 도 그냥 ㅋㅋ 이렇게 보내는 애들이 있다니까? 으, 절대 안 돼!”
“그럼 ㅋㅋ 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데?”
“ㅋㅌㅋㅋㅌㅋㅌㅋㅌㅋㅌ 이 정도는 보내야 진짜 웃는 거 같잖아!”
아이가 종종 나한테도 했던 말이다.
“대답이 ㅇㅇ 이게 뭐야? ㅋㅋ 하지 말고 ㅋㅋㅌㅎㅋㅋㅋ 정도는 해야지!”
“아유, 그럴 시간이 어딨어!” 하고 말았지만,
텍스팅 스타일이 그렇게 중요하다니, 놀라웠어요.
요즘 아이들에게는 외모나 성격만큼 어떻게 텍스팅을 하는가가 더 중요한가 봐요.
사실 그게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결정적인 방법인지도 몰라요.
특히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포노 사피엔스들 에게는요.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이 삶의 커다란 축이 되어버린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말이에요.
마음에 안 드는 방법으로 텍스팅 하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 쉽지 않은 일이겠어요.
그것 말고도 아이가 남자 친구를 고르는 방법은 우리 때와 다르겠죠.
아니, 아이가 살아갈 방법 자체가 다르겠지요. 세상이 달라질 테니까요.
그 달라질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이도 모르지만 우리라고 알까요?
몰라요.
어른으로서 전해줄 지혜가 없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막 변하는 세상에서는요.
우리가 살면서 깨달은 교훈, 안 통하겠죠.
섣불리 조언할 생각, 말아야겠어요.
그저 기분 좋게 술 한잔 함께 기울일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아주 바람직할 것 같아요.
사실 아이는 벌써 엄마가 취하면 같이 취하는 아주 좋은 버릇이 있어요!
술도 안 마시는데 꼭 취한 것 같아요. (취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줬나 봐요.)
그래서 요즘 가장 좋은 술친구예요! 이렇게 쭉 가기만 바랍니다!
물론 또 남자 친구가 생기면 쳐다도 안 봐주겠지만 말이에요.
딸! 인터뷰 즐거웠어! 딸꾹!
아, 맞다. 브런치에 네 사진도 좀 올릴게. 딸꾹!
알았어, 알았어, 안 올릴게. 걱정 마!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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