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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Oct 10. 2020

빗속에서 건져올린 풍경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에서 믈라카 가는 고속도로를 운전 중이었다. 마침 우기라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할 것 없는 날이었다. 우기의 비는 어찌나 거센지 내리기 시작했다 하면 그야말로 눈가리개처럼 시야를 한순간에 가려버린다. 차가 갑자기 커다란 물통에 빠진 느낌이다. 1미터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앞차도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내가 지금 도로를 달리는지 하늘을 날고 있는지도 판별할 수 없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멈추려면 차선을 바꿔야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그건 정말 위험한 일이다. 

와이퍼 속도를 최대한 높이고, 켤 수 있는 모든 라이트를 켜고, 나 여기 있소, 신호를 보내며 앞을 노려본다. 저 앞에 깜빡이는 불빛이 앞 차렸다. 그 차만 엉금엉금 따라간다. 내가 운전을 해서 차가 움직이는지, 차가 그냥 물에 둥둥 떠가고 있는지 모를 정도다. 

다행히 그런 비도 금방 멎는다. 조금만 더 달리면, 메롱, 여기는 비 안 왔지! 하며 갑자기 마른땅이 나타나고 긴장했던 나는 맥이 탁 풀려버린다.           




Photo by Eutah Mizushima on Unsplash





인도네시아 발리 집들은 거실에 문이 없었다. 정자처럼 사방이, 혹은 두 면이, 적어도 한 면이라도 뚫려있는 게 보통이었다. 더운 나라니까 바람 통하라고. 바람이 통해서 좋지만, 비가 오면 비도 통해 버린다. 우기에 비가 오면 보통 거실 끄트머리까지는 물이 들이치는데, 하루는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었는지 온 거실이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어버렸다. 마침 그날은 집에 친구가 놀러 오기로 한 날이어서 나는 신경질을 내며 거실을 닦았다. 아니, 첨벙첨벙 커다란 빗자루로 물을 쓸어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쓸어내도 쓸어내도 효과는 없어 보였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물이 방까지 슬금슬금 들어가 버릴 태세였다. 우기의 비는 짧고 굵은 터라, 다행히 비는 금방 그쳤고, 나는 아직 축축한 그 거실에서 에라 모르겠다, 신발을 신고 친구와 신나게 춤을 췄다. 흥겨운 노랫소리가 빗소리를 묻었다. Yo no se Manana / 요 노 세 마냐나 / 난 내일은 몰라요. 노랫소리를 들으며, 몰라 몰라 고개를 흔들며 애들처럼 춤을 췄다. 미끄러지지 않게 서로 붙잡고 웃으며 몸을 흔드는 동안 신발은 점점 축축해졌다.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수줍은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초등부를 졸업하고 올라간 중고등부 성당 학생회.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내가 다 큰 줄 알았는데, 그때 고등학교 2학년 오빠들은 정말이지 어른 같았다. 그중에 내 마음을 훔쳐 간 오빠가 있었으니, 그를 JK라고 하자. 나는 첫눈에 그에게 반했다. 다른 오빠들처럼 우락부락하지도 않고, 시끄럽거나 말이 많지도 않았다. 오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말없이 서 있다가 가끔 웃었다. 그 이름을 말하거나 내가 좋아한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면, 그 사랑이 훨훨 날아가 버릴까 함부로 말도 못 했다. 아주 친한 친구들하고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별명을 지어 불렀다. 기도는 안 하고 오빠를 보러 성당에 다녔다. 아니, 그 오빠를 더 자주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성당에 가면 오빠가 어디 있는지 가장 먼저 살폈고, 미사를 볼 때도 오빠가 어디 앉아 있는지, 미사가 끝나면 오빠들은 뭘 하는지, 어디로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지 그런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땐 그랬다. 

하루는 잔디와 숲이 어우러진 넓은 공간으로 소풍을 갔다. 공놀이를 하고, 도시락을 먹고, 보물 찾기를 하고 있는데, 비가 왔다. 다들 허둥지둥 비를 피해 달리는데 나의 JK는 그 유명한 로댕의 포즈로 널따란 바위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저 비를 맞고 있었다. 아, 멋지다. 비 맞으며 외롭게 앉아 있는 내 오빠. 그날 나는 나의 JK에게 조금 더 반했다. 그 후로 비가 와도 나는 뛰지 않는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던 오빠를 생각하며 나도 가만가만 걷는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지만, 아직도 비만 오면 떠오르는 나의 JK.      




Photo by Geetanjal Khanna on Unsplash




어렸을 때 우리 집 마당에 작은 화단이 있었다. 철쭉이 있었고 봉숭아가 있었다. 돌을 자연스럽게 쌓고 흙을 채워 만들었는데, 내 키보다 높았다가, 내 키만 해졌다가, 마지막에는 배꼽 정도로 낮아졌다.

댓돌을 밟고 올라서는 마루와 화단 사이의 넓지 않은 앞마당은 장마철이 되면 곧잘 물에 잠겼다. 엄마가 우산을 쓰고 마당에 내려서면 종아리가 다 잠겼다. 엄마는 물을 헤치고 느릿느릿 수채 구멍 근처로 가서 손으로 구멍을 헤집었다.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구부정하게 엎드린 엄마의 등은 이미 다 젖어 있었다. 그 무력한 우산과 엄마의 굽은 등, 그리고 물속에 잠겨있는 엄마의 손. 나는 마루에 앉아 조마조마하게 엄마를 보고 있었다. 혹시 저 물속에서 이상한 생명체가 엄마 손가락을 뜯어먹어버리지는 않을까. 괜히 마루에 앉아 외쳤다. 엄마 그만해! 엄마 그냥 와! 그냥 내버려 둬! 빗소리에 묻혀 내 목소리는 전해지지도 않았다. 엄마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철벅철벅 물을 헤치고 돌아와 마루에 올라섰다. 나는 그제야 큰 숨을 내쉬며 이제 가지 말라고 엄마의 바짓 자락을 붙들었다. 

아, 엄마 보고 싶다. 비 그치면 엄마나 보러 가야겠다.     




Photo by Wenniel Lun on Unsplash








Main Photo by Gianandrea Vill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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