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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an 05. 2021

엉뚱해, 아주 엉뚱해

아주 이상한 반장 선거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연초에 반장선거를 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 공약이랄 게 있었겠으며, 후보도 그 자리에서 정해졌기에 딱히 준비할 것도 없는 선거였다. 선생님이 성적순으로 몇 명의 이름을 칠판에 썼다. 내 이름도 있었다. 이름이 적힌 아이들은 전부 앞으로 불려 나왔는데 다들 어색했는지 칠판에 다닥다닥 등을 대고 섰다. 나머지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는 것처럼. 그중 여학생은 나 혼자였다.      


 그렇게 다 같이 한 줄로 서서 한 마디씩 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당연하지. ‘저는 누구입니다. 제가 만약 반장이 되면 선생님을 도와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정도의 비슷한 말을 반복했을 테니까. 


 내 차례가 왔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수십 개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 앞에서 내 입술은 딱풀로 단단히 붙어버린 듯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여러 번 재촉하더니 결국 포기하고 다른 아이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마지막 아이까지 발표를 했고, 다시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이번에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반장을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나도 열심히 하겠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았는데, 입은 내 편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웃었다. 비웃는 것 같기도 했고, 좋아서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포기한 담임 선생님은 앞에 나와 있던 아이들을 자리로 돌려보낸 후 반 전체 아이들에게 쪽지를 돌렸다. 아이들은 긴장한 눈빛으로 이름을 적어 냈고 담임 선생님은 한 장 한 장 개표를 하면서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렸다.       



반전은 지금부터다.      


 내가 반장이 되었다. 나도 깜짝 놀랐다. 아이들은 도대체 왜 내 이름을 썼을까? 담임 선생님의 의아해하던 얼굴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물론 가장 의아했던 사람은 당연히 나였다. 그래 놓고 일 년 내내 반장 생활은 또 아주 신나게 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살면서 종종 그때가 생각났다. 그럴 때마다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이 피식 터져 나왔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도 했다.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이 또 지나고 보니 이제는 어렴풋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끔 우리는 자신도, 타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기도 하니까. 모든 행동에 딱딱 떨어지는 이유 같은 게 있는 건 아니니까. 아이들은 그냥 재미있어서, 불쌍해서,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내 이름을 적었을 것이다. 삶은 가끔 그런 이유 없는 순간들이 모여 엉뚱하기 짝이 없게 흘러가기도 한다.      


 사실 삶이 온통 그런 일 투성이다. 말 한마디 못하고 벌벌 떠는 여자애가 반장이 되는 그런 일들. 그런 엉뚱한 순간들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쌓여 있다가 또 다른 엉뚱한 순간으로 나를 이끌면서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게 삶 아닐까. 그런 엉뚱한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겠지. 당신 역시 그런 엉뚱한 순간들이 모여서 지금의 당신이 되었을 테고. 그러니까 누구나 그만큼씩은 엉뚱한 게 결국 우리 삶일지도 모른다는 말씀.     


 그러니 가끔은 삶에 너무 커다란 의미 같은 것 부여하지 말자고 생각한다.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 없는 일들은 그저 지나가게 내버려 두자고. 그냥 지나가도 될 일에 괜히 고생스럽게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고. 그냥 좀 엉뚱하게 내버려 두자고 말이다. 그냥 허허 웃어버리거나 어깨 한 번 으쓱해버리면서, 특히 지금처럼 다 같이 힘든 시절에는 더더욱.     


 또 그런 엉뚱한 순간이 펼쳐지면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앗, 건 마치 이십 년 전 그때 그 사건의 엉뚱함과 비슷한 걸?’ 그러면서 그냥 웃고 마는 거지. 내가 어쩔 수 없는 엉뚱한 일에 괜히 성내거나 역정 내지 말고. 안 그래도 피곤한데 그렇게 사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니까.      



 그런데 자꾸 엉뚱 엉뚱하니까 왠지 엉덩이로 이름을 써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문득 드는 이런 엉뚱함이라니. 아, 잘하면 이따 자기 전에 진짜로 한 번 해볼지도 모르겠다. 엉뚱하게 반장이 되던 그 나이 때는 엉덩이로 이름 쓰는 것만큼 창피한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왠지 엉뚱하게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서 말이야.     


 아, 이렇게 엉뚱하게 글을 맺어놓고 또 잘했다고 발행하는 나도 참 엉덩, 아니 엉뚱하다.      









Photo by Alexander Schimmec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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