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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un 03. 2021

걸어야 해결되는 것들

그녀의 마음





그녀는 잘 걸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집까지 버스 타면 금방인 거리를 40분 동안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때 정확하진 않지만 뿌듯한 감정 같은 것들이 약간 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녀가 툭하면 걸어 다녔다거나, 결국 세계를 누비는 걷기 여행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저녁 먹고 밖으로 나가 산책길을 걷는 여자가 되었을 뿐이다. 물론 그녀도 마음만은 세계 구석구석을 뚜벅뚜벅 걸어보고 싶었으나, 그녀의 뜻대로만 펼쳐지는 것이 어디 삶이던가. 


그녀는 저녁을 먹고 운동화를 신었다. 새로 이사 온 집 주변의 산책길을 귀뚜루루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운동기구에서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남자의 실루엣을 보며, 조막만 한 발로 엄마 뒤에서 킥보드를 열심히 밀고 있는 아이 곁을 지나 그렇게 걸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50분. 


그녀에게 새 집이 필요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헌 집에는 마땅히 걸을 곳이 없어서였기 때문이었다. 걸어야 해결되는 찌그러진 마음 같은 것들이 있는데, 걸을 수 없으니 전 집에서는 마음 측에서 불만이 몹시 많았다. 겨우 주차장이라도 걸어볼까 나가면, 이번에는 두 다리 측에서, 이런 곳이나 걷자고 굳이 나를 데리고 나온 것이냐 투덜거렸다. ‘아, 미안. 그래도 지금은 마음이 조금 많이 찌그러져서 좀 걸어야겠어. 협조를 부탁해.’ 그렇게 살살 달래 가며 겨우 걸어야만 했던 집을 떠나 새 집으로 이사오니, 마음은 펴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스스로 다림질을 조금 한 것 같고, 두 다리도 운동화를 신고 씩씩하게 나가는 발걸음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걷기는 곧잘 달리기에 대한 욕심과 자만, 과시로 이어지기 십상인데, 그녀는 어젯밤 그 욕망을 누르느라 힘이 들었다. 한동안 달리지 않다가, 이사 전후로 배달 음식에 의지해 살도 조금 붙은 마당에 섣불리 뛰었다가 이번에는 무릎 측에서 파업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래도 한 번 뛰어볼까 싶은 머릿속 욕망을 달래느라 아주 고생했다. ‘내가 이래 봬도 10킬로미터 거뜬히 달리던 여자였다고!’ ‘그래, 알아. 하지만 다 옛 일이야. 지나갔다고. 젊음이 지나가듯, 달리기도, 걷기도, 곁에 두고 친구 삼지 않으면 금방 떠나가 버린단 말이야. 슬슬 불러오자. 조금만 참아.’


그녀는 그렇게 혼자서 중얼중얼, 달빛처럼 환한 가로등 아래를 걸었다. 걸어야 해결되는 것들이 아주 조금 정리되었다. 그러니까 좀 혼자 있고 싶은데 하는 마음, 아니, 어느새 이런 뚱땡이 못난이가 되었지 하는 마음, 여러모로 귀찮게 하는 동거인들이 미워지려는 마음, 어느새 흰머리가 이렇게 많아졌지 하는 마음 등이 바로 걸어야 해결되는 것들이었다. 대략 1단계일 경우에는 걸어도 해결되지만, 그런 마음들을 방치해 2단계가 되면 슬렁슬렁 걷는 것으로는 쉽게 해결하기 힘들고, 3단계로 불쑥 자라 버리면, 그러니까 이번 생은 망했어, 라는 생각이 들거나, 이놈의 집구석을 그냥 콱! 이렇게 강도가 높아지면 결국 헉헉 달려야만 해결된다. 어쨌든, 이제 다시 해결 방법이 생긴 것 같아 그녀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고,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입꼬리도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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