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물럿거라!
등장인물
그녀 1 : 주인공 아리가 자가격리하는 집의 주인이자 아리의 동생 / 언니와 조카의 격리 때문에 덩달아 격리하면서 재택 근무 중
그녀 2 : 아리
그녀 3 : 아리의 딸 / 간만에 한국을 찾아 신이 났지만 격리의 하루하루가 너무 안 지나가 괴로운 사춘기 소녀
세 사람이 14박 15일 동안 한 집에 갇혀 있다.
Scene #1
그녀 1 : 대학생 때 이후로 이렇게 집밖에 안 나가본 건 처음이다.
그녀 2 : (코로나 규제가 훨씬 심했던 말레이시아 생활을 떠올리며) 진짜? 우리는 거의 2년 째 이렇게 살고 있는데!
세 사람이 한 집에서 그럭저럭 안 싸우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일을 하고 온라인 수업을 듣습니다. 때가 되면 후다닥 모여 점심을 먹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각자의 공간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어쩐지 정신적 공간은 부족합니다. 완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 그래야 차오르는 저는 늘 완충되지 못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로 그럭저럭 버티고 있어요. 시간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흘러가긴 하네요.
Scene #2
그녀 3 : 얼른 와! 시작해!
그녀 2 : 그래, 알았어.
그녀 3 : 오늘은 몇 편 가능?
그녀 2 : 한 두 편? 재밌으면 세 편?
격리 중 오락으로 드라마를 하나 골라 정주행 합니다. 오후 4시 경, 그녀 3의 온라인 수업이 끝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커다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드라마를 보기 시작합니다. 격리 중 최고의 오락이자 유일한 오락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텔레비전은 그야말로 양날의 검입니다. 내가 보고 싶을 때는 보고 싶지만, 내가 보기 싫을 땐 아무도 안 보면 좋겠습니다. 각종 소리에 민감한 귀라서, 내가 보지 않는 소리가 주변에서 계속 나고 있으면 정신이 몹시 까다로워집니다. 제가 그래서 결혼 후 외쳤죠! “우리 집에 티비는 안 돼!” 지금 남편은 혼자 거실에 티비를 꺼내놓고 소파에 드러누워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겁니다. 어쨌든, 텔레비전은 저의 에너지를 빨어먹는 귀신이에요. 큰 텔레비전일수록 기가 확 빨려요. 하지만 또 이렇게 큰 화면으로 정주행 하는 맛도 있긴 있네요. 그러니 그야말로 양날의 검. 게다가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국에서 본 방송이 끝나야 볼 수 있어 늘 한 발짝 늦었는데, 한국에 오니 본방을 제시간에 시청하는 맛이 있군요. 예전에 신문이 오면 텔레비전 프로그램 나오는 면을 펴서 보고 싶은 프로그램에 연필로 동그라미를 치고 시간이 되길 기다리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지금도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우리 마음과 뇌를 보호할 수 있는 텔레비전 시청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암요.
Scene #3
그녀 3 : 아, 나가고 싶다! 며칠 남았어? 엉엉. 지겨워. 언제 끝나? 왜 꼭 14일 씩이나 있어야 해? 구시렁구시렁
벌써 세 번째 격리인데, 시간은 늘 비슷하게 안 가네요. 세 사람과 함께 격리하는 건 처음입니다. 처음에는 이 아파트를 혼자 독차지하고 (동생이 지원금을 받아서 고맙게도 호텔 생활을 해주었답니다.) 두 번째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한 호텔 방에서 혼자 지냈어요. 집이 아니라 방 한 칸이라 그랬는지, 막바지에는 가슴이 막 답답해지더군요. 무섭게시리. 그리고 지금이 세 번째. 이번에는 셋이 함께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몹시 피폐합니다. 혼자 있고 싶어요. 엉엉. 네, 당연히 혼자가 백배 천배 만배 낫다는 말입니다.
Scene #4
그녀 3 : 뭐 먹을 거 없나?
그녀 2 : 그러게 뭐 먹을 거 없나? 또 한 번 왕창 시켜?
먹는 건 또 어떻고요. 금방 먹고 돌아서 놓고 또 먹을 게 없나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몰 앱을 열었다 배달앱을 열었다 난리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루를 끌고 가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하루에 끌려가는 느낌. 합리적 판단이 잘 안 되고, 왠지 계속 뭔가 아쉽고 허전합니다. 그래서 계속 애먼 냉장고만 열고 닫아요. 혼자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그게 안 되니 그 대신 가장 쉬운 해결책을 찾는 거지요. 심심한 것도 한 몫 하고요. 심심한데 할 건 드라마 정주행밖에 없으니 하루 종일 먹을 것만 생각합니다. 냉장고를 여닫다 지겨우면 괜히 와인 냉장고까지 한 번씩 열어봅니다. 대낮부터 한 잔 마셔 말어? 하면서 말이에요.
Scene #5
그녀 1 : (밤인데도 식탁에 앉아서 타닥타닥 노트북을 두드린다. 말은 없다.)
그녀 2 : (유튜브로 홈트 영상을 켜고 에어팟을 끼고 그녀 1의 시선이 바로 닿는 곳에서 엉거주춤 몸을 움직이며 구시렁거린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밤 늦게까지 일을 하는 거야?
그녀 3 : (누구에게도 내가 운동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자세로 혼자 방에 들어가서 낑낑댄다.)
네, 바깥은 이미 가을인데 나가서 뛰지도 못하고 홈트로 겨우 연명합니다. 오늘은 빅시스 언니. 오늘도 겨우 땀을 조금 흘렸네요. 빨리 나가서 달리고 싶어요. 온몸이 축축해질 정도로 뛰고 싶어요. 나이키 앱이 울고 있습니다. 운동화가 시름에 잠겼어요. 먹는 건 늘고 움직임은 줄고. 네, 여러분, 격리가 이렇게 안 좋은 겁니다.
Scene #6
띵동 벨소리가 울린다. 후다닥 나가 문을 열고 상자를 들고 온다.
그녀 2 : 복숭아 먹자! 아, 맞다. 김치도 거의 떨어졌길래 아까 주문했어.
그녀 1 : 어? 나도 주문했는데! 내가 배추김치랑 총각김치 주문했어.
그녀 2 : 앗, 나도 그 두 개 주문했는데. 그럼 한 명은 취소해야겠다. 취소 되나?
그녀 1 : 응. 아마 부분 취소 될 거야.
그녀 2 : (앱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와, 개별 최소가 가능하네! 역시 한국 좋다. 취소 완료!
아, 한국은 정말 인터넷 쇼핑이 최고더군요. 말레이시아에 있을 때는 인터넷 쇼핑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게 또 복잡해요. 겨우 비교의 개미지옥을 뚫고 골라놓으면 결제의 벽에 막합니다. 현지 계좌는 없고, 해외라 안되고, 한국에서 인증번호를 받아야 하고 그러다가 에잇! 하고 포기하기 십상이었죠. 나가서 콧바람도 쐬면서 직접 사오는 게 더 편했어요. 그런데 코로나로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온라인 쇼핑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쇼핑몰 아이디도 없는 저는 필요한 건 어찌어찌 겨우 찾아서 남편에게 링크를 보냅니다. 대충 비슷한 거 사줘, 이러면서. 그런데 한국은 정말 좋더군요. 격리 시작과 함께 **몰 앱을 깔아 식재료를 주문했어요. 와, 복숭아다! 와, 참외다! 하면서 신나게 주문해 먹었습니다. 배송 시각도 정할 수 있고요. 결제한 후 일부 품목만 취소가 가능하다니! 말레이시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랍니다. 네, 당연하다고요? 아니, 다들 정말 이렇게까지 편하게 사셨던 겁니까!
아, 말 나온 김에 카카오택시 이야기도 좀 할게요. 작년에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말레이시아 폰으로는 카카오택시를 사용할 수 없었거든요. 뭐라고요? 안 믿기신다고요? 그렇죠? 요즘 세상에 카카오택시 없이 어떻게 사냐고요? 네, 제가 그랬어요. 그래서 조금 먼 거리에 걸어서 어찌어찌 가면, 또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40분을 걸어서 집에 오거나, 퇴근하는 동생에게 비굴하게 픽업을 부탁하곤 했어요. 저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데, 택시를 잡을 수가 있어야지요. 차도에 서서 손을 내밀어 택시를 잡는 방법은 한국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같은 폰에 카카오택시가 깔리는 거 아니겠어요? 역시, 나만 열심히 일하는 줄 알았는데 그들도 열심히 일하고 있나봅니다. 일 년이 지났으니 그 정도 업그레이드는 되어야겠죠. 어쨌든 아직 격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얼마나 뿌듯하던지요. 아니, 남들 다 쓰는 카카오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떠드냐고요? 죄송해요. 너무 신기해서 그래요. 저 카카오뱅크도 없는 녀자거든요. 비밀번호를 까먹었는데, 어디로 전화를 하래요. 해외에서 어떻게 전화를 합니까. 그래서 에잇 안 써! 하면서 방치 상태랍니다. 앗, 혹시 이것도 달려졌는지 한 번 살펴봐야겠네요.
자가격리 기간 14박 15일은 귀신같이 계산해서 정한 걸 겁니다. 바이러스 잠복 기간이라고 하지만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진짜 인간 심리를 기가 막히게 파악해서 정한 걸 거라고요. 정말로 답답해서 미쳐 팔딱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에 딱 꺼내준다는 말입니다. 흠, 누가 정했는지, 정말 귀신 같아. 이러면서 말도 안 되는 말을 중얼중얼. 네, 사람이 이렇게 된다니까요.
하지만 어찌어찌 시간은 또 가고.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저는 이미 상쾌한 바깥 공기를 마시며 미친년처럼 깨방정을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Photo by Manuel Peris Tirado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