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한테만 그래
달리기를 합니다. 에어팟을 끼고요. 에어팟을 산 후로 생활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몰라요. 달리기를 할 때도, 요가를 할 때도, 심지어 설거지를 할 때도 얼마나 편한지! 예전에는 이어폰 줄을 주렁주렁 달고 어떻게 했을까요? 아무튼, 그 에어팟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전기 제품과 유난히 친하지 않은 사람들 있죠? 예를 들어 텔레비전 리모컨이라면요, 제가 사용할 수 있는 한계는 켜고 끄기, 볼륨과 채널 정도예요. 지금은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잘 모르는데, 친정이나 친구 집에 가면 온갖 채널이다 나오는 그런 텔레비전이 있잖아요? 외부 입력 어쩌고 하는. 그게 벌써부터 그렇게 어렵더라고요. 조심조심 채널을 바꾸거나 음량을 조절하는 건 하겠는데, 갑자기 엉뚱한 버튼이 눌려서 화면이 까매지거나 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삐뽀삐뽀! 이것저것 해보다가 그냥 꺼버려요. 그런 분야에 있어서는 잘하고 싶다, 노력해서 더 알고 싶다는 욕심이 전혀 없어요. 그냥 깔끔하게 포기!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 딸한테 얼마나 잔소리를 들을까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어려운 걸 어떡해요. 자, 여기까진 그저 기계랑 별로 안 친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제 손이 닿으면 여러 기계가 갑자기 이상행동을 해요. 남들은 다하는 걸 내가 하면 안 되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 단말이에요. 분명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면 분명 되는데, 제가 하면 아무리 해도 안돼요. 그래서 안된다고 남편을 부르면 또 금방 돼요. 그러면 그는 절 이상한 사람, 혹은 바보 쳐다보듯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봐요. “내가 할 때는 안됐다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요즘은 한 번 해보고 안돼 면바로 불러서 보여줘요. “봐! 안되지? 내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하라는 대로 다 해도 안되잖아!” 흠, 그제야 그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만져보죠. 바로 될 때도 있고 또 안될 때도 있어요. 그래서 그의 결론은, 아니, 우리의 결론은 이거예요. 나한테서는 전자 제품의 정상 작동을 방해하는 이상한 전파가 나온다!
그런데 에어팟은 말이죠. 귀에 착 꽂으면 음악이 나오고, 쏙 빼면 알아서 딱 멈추더라고요. 줄로 연결된 것도 아닌 것이, 한번 아이폰과 연결해 놓으니 알아서 척척 열렸다 닫히는 신세계 같았어요. 어렵게 조작할 필요도 없고 충전도 가끔 해주기만 하면 되고. 결정적으로 안된다고 남편을 부를 일도 없는! 그 단순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빛내주는 나의 사랑스러운 에어팟! 그러니 달릴 때마다 마치 내 몸의 일부인 듯 에어팟을 귀에 착 꽂고 달리죠.
그러던 어느 날!
음악을 틀었는데 왼쪽에서 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블루투스를 다시 연결해봐도 여전해요. 어제까지 잘 되던 게 갑자기 안 되면,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그 순간 직전의 기분이 상황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죠. 말하자면, 기분이 평균선 위에 있다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오늘 은 하늘이 유난히 예쁘네.’ 하겠지만, 기분이 평균선 아래라면 갑자기 신경질이 나기 시작해요. ‘쳇, 하늘 따위 꼴도 보기 싫어!’ 하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그날은 달리다가 짜증이 마구 났어요. 달리다 말다, 블루투스를 끊었다 이었다 하면서 마구 씩씩거렸어요. 그렇다고 달리기를 그만두기는 싫고, 음악은 필요하고, 한쪽 귀에만 쩌렁쩌렁 울리는 그 느낌도 불편하 고. 달리고 나서도 평소처럼 기분이 좋지도 않아요. ‘에잇, 이놈의 에어팟!’ 하면서 나의 사랑스러운 에어팟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어요.
그리고 다음날,
달리러 가기 전에 단단히 충전해 놓은 에어팟 상태를 확인했어요. 아니, 종일 꽂아 좋았는데 왜 한쪽은 99퍼센트, 다른 쪽은 3퍼센트일까요. 또 짜증이 확 났지만 어째요. 달리러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귀에 꽂으니 어쨌든 처음에는 양쪽 다 잘 나오긴 하더라고요. 3퍼센트의 힘인가. 신나게 노래를 들으며 달렸어요. 그런데 달리다 보니 삐리릭! 하면서 결국 한쪽이 죽더군요.
어제와 같은 상황이에요. 한쪽이 안 나오는 상황.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도 짜증이 나지 않았어요. ‘흠. 오늘은 기분이 평균선 이상인가?’ 그럴 수 도 있었겠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어요.
이해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처한 상황을. 나의 사랑스러운 에어팟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를. 내 몸에서 이상한 전파가 나와서가 아니라 충전이 안 되어서 그렇다는 걸. (왜 한쪽은 3퍼센트만 충전되었느냐는 여기서 논하지 않을래요. 저한테는 뭐랄까, <갈루아와 케플러의 수학 이론이 현대 대수학에 미친 영향> 정도의 논문을 읽어야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거든요.) 어쨌든 ‘충전되지 않은 에어팟은 꺼진다.’라는 명제까지만 우선 이해하고 넘어가요. 그리고 그 현상과 사물에 대한 이해가 감정의 동요를 미연에 방지한 거예요. 이해의 힘이 이렇게 큽니다. <에어팟의 작동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사용자의 심리적 수용 과정에 대하여> 정도의 논문이라면 조금 이해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다른 예로, <사춘기의 호르몬 변화가 수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해하면 매일 해가 펄펄 끓을 때까지 잠자는 아이를 봐도 화가 나지 않아요. 원래 그 시기에는 새벽이 되어야 잠 오는 호르몬이 나온대요. <화학 약품 냄새에 대한 정신적, 신체적 트라우마>라는 남편의 히스토리를 알면 매니큐어는 늘 마당에서 바르거나 그럴 수 없다면 환기에 특별히 신경을 써요. 그래도 그는 자신의 기분 평균선에 따라 간혹 짜증을 내기도 하는데, 그래도 그냥 이해가 돼요. 상대가 나한테 괜히 짜증을 내면 나도 함께 짜증이 나지만, 그 짜증의 이유를 이해하면 그만큼 화가 나지 않아요.
현상과 사물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나의 기분이 평균선 이상이든 이하든 그 상황은 나에게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아요. 감정이 먼저 달려들기 전에 머리가 정리해주는 거죠. ‘자, 여기서 그만. 이건 화낼 일이 아니야. 충전이 안되어 작동이 멈춘 것뿐이야. 들어가서 잘 충전해 놓으면 내일 또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달릴 수 있어.’ 라고요. ‘호르몬의 변화 때문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호르몬 방출 시간이 바뀌고 자연스럽게 수면 시간도 바뀔 거야.’ ‘실험실에서 지겹게 맡았던 냄새를 다시 맡고 싶지 않은 그 마음 당연히 이해해.’ 그렇게 마음이 단순하게 정리됩니다. 이해는 그래서 중요해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결국 인간의 역사인지도 몰라요. 천둥이 치는 이유를 알면 더 이상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죠. 일식과 월식의 원리를 알면 괜히 자연현상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고요.
그렇게 충만한 이해의 힘으로, 한쪽 귀만 쩌렁쩌렁 울리는데도 썩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땀 흘리며 달렸어요. 확실한 이해는 불필요한 감정의 격랑을 줄여준다는 삶의 비밀씩이나 깨우친 것 같아서 괜히 기분도 좋았고요.
다음날,
배터리를 또 확인해요. 양쪽 모두 90퍼센트! 충전도 잘 되었네요. 좋았어! 하고 달리기 시작해요. 기분 좋게.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끝나면 좀 심심하겠죠?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니까요.
이번엔 반대쪽이
또
갑자기
안 들리기 시작해요.
저는 다시 멘붕에 빠집니다.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박힌 거예요. 분명 둘 다 90퍼센트였는데 왜!!!!! 옆에 아무도 없었으면 아악!!!! 마구 소리를 지르며 달렸을 거예요. 하지만 아름다운 해 질 녘, 평화롭게 산책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또 한 번의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다 때려 넣고 달달 볶는 두루치기처럼,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온갖 감정을 부여잡고 계속 달렸어요. 이해한 후의 명료한 마음 따위, 옆집 개가 물어가 버린 걸까요. 역시 저한테서 이상한 전파가 나오는 게 틀림없어요.
며칠 후,
남편이 줌으로 회의를 하고 있는 방문 앞에 잠시 서 있었어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있던 그가 갑자기 나를 보더니 말해요. “뭐야! 인터넷 이 끊겨 있었잖아!”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었어요. 역시 이상한 전파 때문에 와이파이가 끊겼나 봐요. 멀리 떨어져 소파에 앉아 있는데 회의를 마친 그가 나와 쐐기를 박아주네요. “너한테서는 정말 이상한 게 나오는 것 같아.”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현상이 이 세상에는 존재할 거예요. 그렇죠? 제가 어쩌면 그런 존재인지도 모르겠어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현상 씩이나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니요. 꿈이 컸나 봅니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 여러분은 있나요?
저처럼 내 손만 닿으면 기계가 이상해지는 그런 이야기 말이에요.
Photo by Khoa Nguye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