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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Sep 24. 2021

카페 생활자의 하루

먹고 일하고 마시고




스타벅스입니다. 카페에 노트북을 펴 놓고 앉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번역가인 저는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인터넷도 있어야 하네요. 말레이시아에서도 작업 진도가 잘 안 나가면, 괜히 집에서 일하기 싫으면 짐을 싸들고 근처 카페로 갔습니다. 발리에 살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매일 다른 카페에서 일하는 것도 좋았고, 단골을 만들어놓고 직원들과 다정한 인사를 나누며 일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일만 했게요. 남편과 싸우고 난 후의 마음도 다스리고, 일기를 쓰면서 잘 살고 있나 돌아보고, 그저 아무것도 안 하면서 마음이 온전한 쉼을 선사하기도 했지요. 그런 쉼, 집에서는 다들 안 되잖아요? 


뚜둥! 그런데 코비드가 터지고 카페들이 문을 닫습니다. 카페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던 저는 집에서도 잘 된다! 세뇌를 하며 억지로 적응해야 했지요. 금방 죽을 것 같던 바이러스는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그렇게 거의 이 년째 카페와 강제 격리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국에 왔고, 격리를 했고, 격리가 풀렸으니 이제 다시 배낭에 노트북을 넣고 카페 탐험에 나설 수 있게 되었지만! 온라인 수업을 듣는 아이가 옆 방에 있으니 자유롭게 나갈 수도 없습니다. 매일 조금씩 다른 점심시간에 맞춰 밥상을 대령해야 하니까요. 후다닥 도장만 찍고 올 거면 아예 안 가는 게 낫죠. 바리바리 짐을 쌌다 풀었다, 왔다 갔다 그게 뭐랍니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제 겨우 조금 쌓인 집에서 작업하기 내공을 발휘하며 어찌어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친구 집에서 이틀 자고 온다는 날이 다가왔고, 점심 대령하지 않아도 되는 저에게도 마침내 자유가 찾아옵니다! 드디어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야심 찬 외출을 감행합니다! 기다려라, 별다방! 


사람이 많더군요. 우선 중앙의 커다란 나무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꺼냅니다. 책상과 의자 높이도 딱이군요. 하루 종일도 거뜬하겠어요! 집에서 마시던 카누 대신 라테! 내친김에 루꼴라 바게트 샌드위치도 하나!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니 충실하게 먹는 것 먼저! 그리고 배를 두드리며 작업을 시작합니다. 몹시 흐뭇합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타인들이 괜히 반갑고요. 눈인사를 할 것도, 통성명을 할 것도 아니지만 그저 옆에 있는 타인의 존재 자체가 위안이 됩니다. 바이러스도 무섭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게 그리웠어요. 방에서 혼자 음악 틀어놓고 일하는 것도 좋지만, 옆에 앉았다 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은근슬쩍 이야기도 엿들으며 일하는 게, 이상하지만 집중도 더 잘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까부터 한 가지 걱정이 있었어요. 화장실은 어떻게 가지? 노트북은 괜찮을까? 

네, 쓸데없는 걱정이죠? 알아요. 아무도 가져가지 않겠죠. 예전에는 저도 다 늘어놓고 나가서 근처 분식집에서 점심까지 먹고 들어오기도 했는걸요. 물론 그때는 누가 제발 훔쳐가 버렸으면 했던 구닥다리 무거운 노트북이었고 지금은 아직도 새 것 티가 팍팍 나는 맥북에어란 게 좀 다르지만요. 


한동안 SNS에 한국에서는 카페에 그렇게 물건을 놓고 나가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다고 신기해하는 외국인들의 글이나 영상이 종종 있었더랬지요. 맞아, 당연하지. 한국 만세!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었는데, 그랬던 사람 어디 갔을까요. 말레이시아에서는 같은 별다방이라도, 아니 어디서든, 무서워서 화장실에 잘 못 가요. 조심하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가 봐요. 그래서 화장실은 일행이 있어야만 가는 편이에요. 아니면 주인이 카페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작은 곳들을 이용했지요.


그런데 서울의 별다방은 거대해요. 화장실은 뒷문으로 나가야 해요.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서울은 안전할 걸 알면서도 걱정이 돼요. 아니, 어쩌면 제가 다른 나라에 사는 동안 서울 사람들도 약간은 무서워졌는지도 모르죠. 흠, 우선 화장실 가고 싶은 상태는 아니니 버텨 봅니다. 나가서 밥도 먹고 오던 사람이 어쩌다 이런 쫄보가 된 걸까요.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봐요. 말레이시아의 걱정에 너무 적응을 해버렸어요. 


어쨌든 작업 시작! 앗, 다이어리는 꺼냈는데 볼펜은 안 가져왔네요. 뭐라도 손으로 직접 끄적여야 두 발이 땅에 닿듯 차분해지면서 오늘의 작업을 시작할 준비가 되는데 말이에요. 할 수 없죠. 오랜만에 카페에 오다 보니 준비가 미흡합니다. 그렇게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눈이 아파요! 세상에, 안경도 놓고 왔네요! 하도 오랜만에 작업 가방을 싸다 보니 구멍이 많군요. 안 해본 티가 팍팍 나요. 이 쨍한 블루 라이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얼마나 오래 작업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요. 천장의 시스템 에어컨이 얼마나 강력한지 조금 쌀쌀하다 싶어 카디건을 꺼내 입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으니 체온이 점점 내려가요. 에어컨 바람이 가장 닿지 않는 자리로 옮겨 보려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는데 어찌나 시스테믹 하게 에어컨을 박아 놓았는지 별다방 구석구석까지 그 바람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요. 어째요. 그래도 조금은 더 버텨야죠. 커피도 마시고 샌드위치까지 먹었으니 이렇게 금방 나갈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손가락이 점점 얼어요. 아니, 지금 바깥은 해가 쨍쨍한데 손이 시린 이 느낌은 뭔가요? 벌써 겨울 체험인가요? 나만 춥나요? 


할 수 없이 불쌍한 손가락들을 위해 주섬주섬 다시 가방을 쌉니다. 하지만 이대로 집으로 간다고요? 노노. 카페 놀이, 아니, 카페 작업을 할 수 있는 날이 이렇게 자주 오지는 않을 거거든요. 근처에 투썸이 있었어요. 두 번째 목적지로 당첨. 나가서 해를 받으며 걸으니 몸이 노곤노곤 녹아갑니다. 솜사탕처럼 흐물흐물해질 때쯤 도착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투썸에 씩씩하게 들어갔더니, 손님이 아니라 공사 중인 인부들이었어요. 웁스, 아직 오픈 전이랍니다. 할 수 없지요. 길 건너 쇼핑몰 안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를 이용하기로 해요. 널찍하고 사람도 별로 없어 좋네요. 창가에 자리 잡으니 해가 유리를 데우고 몸도 적당히 데웁니다. 손가락 얼 일은 없겠어요. 에어컨도 멀어요. 이 정도면 아주 일이 잘 될 것 같아요. 하는 수 없이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마셔요. 맛있어 보이는 빵들은 잠시 참아요. 먹으러 다니는 거 아니고 일하러 온 거잖아요. 이따 배가 고파지길 기다려 봐요. 아차차! 그런데 다시 카페에 자리잡기 전에 쇼핑몰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걸 깜빡했네요! 이런, 아마추어같이 왜 이러는 걸까요? 그런데 옆 테이블에 노트북이 펼쳐져 있고 사람이 없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합니다. 흠, 그래. 괜찮을 거야. 걱정 말고 믿으라! 아멘! 그렇게 다시 작업에 매진하는데, 저 자리의 주인은 화장실이 아니라 아주 먼 데를 가셨나 봐요. 한 시간이 되어도 안 돌아오십니다. 걱정이 점점 믿음으로 바뀝니다. 다행이에요. 


시계가 부지런한 동안 창가 자리는 내내 따뜻합니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 왜인지 모르겠지만 또 배가 고파요. 야호! 배가 고파져야 한다고 무의식이 뇌에 신호를 주었을까요? 아무튼, 가벼운 발걸음으로 룰루랄라 빵을 사 옵니다. 먹고 일하고 먹고 일하고, 이 단순한 하루 일과가 이렇게 행복할 수 없어요. 아, 중간에 쇼핑몰 한가운데 있는 화장실도 걱정 없이 잘 다녀왔고요. 


창을 데우던 해가 슬슬 힘을 뺍니다. 그늘이 길어집니다. 곧 오늘의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열심히 일한 자, 씩씩하게 걸어서 집에 갑니다! 전철역 한 정거장 거리예요. 올 때는 전철을 탔으니 갈 때는 좀 걸어야지요. 사실,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분식집에 들러 김밥도 한 줄 뚝딱 했지 뭡니까. 뇌를 많이 쓰면 그렇게 배가 고프다니까요. 암튼, 부지런히 먹었으니 부지런히 걷습니다. 한 이십 분 걸었을까요. 집에 도착할 즈음되니 가방을 멘 어깨가 아픕니다. 아니, 뭐가 들었다고! 깃털처럼 가벼운 맥북 하나 넣었을 뿐인데, 아, 원서가 들어있는 아이패드도. 그게 전부인데 왜 이리 무겁나요. 아, 배터리가 금방 닿는 아이패드 충전기도 넣었군요. 그게 얼마나 무겁다고. 맞다. 다이어리랑 지갑도. 그것뿐인데 그게 이렇게 무거울 일입니까. 그래도 신경질이 나기 전에 집에 도착해서 다행이에요. 카페 생활자의 뿌듯한 하루가 이렇게 갑니다. 이제 집에 가서 맥주 한 캔 마시면 더 완벽한 하루가 되겠지요. 아마추어같이 굴지 말고 다음에는 반드시 안경이랑 펜도 잘 챙기자고 다짐하며, 아, 그리고 걱정 말고 믿으리라 다짐하며, 딸깍 맥주 캔을 땁니다. 그렇게 한 캔은 두 캔이 되고, 두 캔은 …… ㅅ ….








Photo by Athar Kh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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