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은 친절한데 친절하지 않은 것 같아.”
이제 어느 정도 한국 생활에 적응한 열여섯 살 아이의 말이었습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빵가게에 들어갔는데,
어서 오세요!
원하시는 메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라고 커다랗게 외치더라고요.
직원 셋, 손님은 둘 뿐인 한 평 짜리 가게에서 말이에요. 빵을 골라 계산하고 나가는데 굳이 등 뒤에 대고 또 큰 소리로 계속 외쳐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것이 그 가게의 매뉴얼이겠지요. 손님 접대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겠지요.
하지만, 조금 더 조근조근해도 괜찮을 텐데요. 굳이 그렇게 우렁차지 않아도 될 텐데요. 정해진 매뉴얼대로 꼬박꼬박 친절한 문장을 말하지만, 마음은 조금도 담기지 않은 걸 아이도 느꼈나 봅니다.
그래서 친절한데 친절하지 않은, 알쏭달쏭한 사람들이 된 거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친절을 강요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불친절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살던 말레이시아는 어찌 보면 더 불친절합니다. 가게에 들어가서 인기척을 하지 않으면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느라 손님이 오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보고 가던가, 하는 표정으로 눈길 한 번 주고 말거나요.
어쩌면 그게 더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내가 굳이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직원도 굳이 마음에도 없는 매뉴얼을 읊어야 할 필요는 없는 거고요. 결국 그의 기분과 나의 기분이, 그의 처지와 나의 처지가 비슷하지 않을까요. 손님은 왕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객일 뿐인 거지요.
한 번은 한국에서 컴퓨터를 수리하러 갔어요. 맡기고 기다렸더니 들어오라고 합니다. 직접 기사님 책상까지 가서 친절한 설명을 들었어요. 친절한 설명까지는 좋은데 기사님의 태도가 몹시 과해서 기분이 불편했어요. 나는 컴퓨터를 잘 아는 전문가이자 내가 모른다고 무시하지 않으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인데, 지나치게 친절해서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전문가가 내 앞에 서 있었습니다.
수리를 받은 후 제가 남기게 될 점수 혹은 별점 때문이었겠지요. 물론 몇 년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고객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거나 속이는 전문가들도 많았을 거예요. 그래서 억울하거나 화가 나기도 했을 테고요. 이를 바로잡기 위해 그런 제도를 만들었을 텐데, 요즘은 왠지 적정 수준을 넘어 반대편으로 너무 과하게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가 오면 배달의 민족 콜센터 직원들은 하루 종일 ‘죄송하다’는 말을 기계처럼 내뱉어야 한다고 합니다. 기상 조건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왜 배달이 늦냐는 불평을 업주와 고객 양측 모두가 쏟아붓는다고 해요.
친절한 설명 따위는 들어올 여지조차 없는 거죠. 그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속상한 마음을 누군가에게는 풀어야 하고 그 누군가가 바로 콜센터 직원들일 겁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는 능력에 우리에게 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비가 와서 늦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게 나의 음식이어서는 안 되는 걸까요?
어디 가서 대접받고 싶은 마음, 갑이 되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을 읽어줘야 살아남을 수 있는 무한 경쟁의 시대이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예의 바른말들을 꼬박꼬박 내뱉고, 늘 죄송하고, 전문 지식에 친절을 넘어 비굴함까지 갖추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갑이 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을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한쪽의 기분을 높여주기 위해 다른 한쪽이 지나치게 엎드려야 하는 상황이죠. 그런 상황에서 갑과 을의 기분은 어떨까요. 갑은 큰 소리로 인사를 받아서 좋고 을은 큰 소리로 인사해야 해서 피곤하겠죠. 문제는 비단 인사뿐만이 아닐 거예요.
상대의 기분부터 심할 경우 상대의 밥줄까지, 우리는 어쩌면 갑에게 너무 많은 것을 쥐어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갑과 을의 기분을 평균 내보면 서로 대접하지도, 대접받지도 않는 말레이시아와 비슷할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한쪽은 높고 한쪽은 낮아서 같아진 평균은 썩 반갑지 않네요. 일부러 평균을 내지 않아도 그냥 너와 나의 기분이 비슷하면 좋겠어요.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나라, 손님이 왕인 나라, 돈 내는 사람이 최고인 나라. 좋은 나라일까요, 나쁜 나라일까요.
어떤 서비스를 받든 한참 기다려야 하는 나라들이 많지요. 내가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 누군가 항상 대기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자신의 시간을, 어쩌면 중요한 가족 행사를 포기하면서 말이에요.
우리처럼 부르면 재깍 와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부르는 사람은 당연히 화를 낼 수 있고, 불려 가는 사람은 당연히 죄송해야 하는 게, 정말 괜찮을까요? 나에게 가족의 일이 있어서 못 가니 너는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당당히 말하고, 또 그럼 어쩔 수 없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기다리는 게 자연스러운 나라는 어떨까요. 언제부터 우리에게 기다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되었을까요? 총알배송이 우리 버릇을 잘못 들여놓은 걸까요? 아니면 별점 제도가 그런 걸까요?
어느 정도의 친절은 서로의 기분을 좋게 해 주지만 지나친 친절은 이를 베푸는 사람에게 분명 독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독은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아마 그들 가장 가까이 있는 어느 약자가 되겠지요. 아이들이, 더 힘없는 배우자가, 길다가 잠깐 어깨를 부딪힌 노인이 말이에요. 내가 어느 한 곳에서 을이 될수록 또 다른 곳에서는 그만큼 갑이 되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일 테니까요.
그러지 말고 조금씩 서로에게 더 무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가게에 들어가서 꼭 큰소리로 인사받을 필요 없잖아요. 친절하면 되지 비굴할 필요는 없잖아요.
누구나 다 조금씩 무심하게, 그렇지만 평등하게, 딱 필요한 정도로만 친절하게 지낼 수는 없을까요.
아, 깜빡할 뻔했네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인사를 하더라고요. 말로만 하는 것도 아니고 안녕히 가시라고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말이에요. 심지어 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 어르신께서 말입니다. 저도 덩달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네요. 좋았습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 섰어요. 밤이었고요. 차들이 썩 다니는 길이라 한참 기다려야겠구나 생각했는데 하얀 차 한 대가 금방 멈춰줍니다. 건너가라고.
아이가 말해요. ‘말레이시아 같았으면 계속 기다려야 했을 거야.’
제가 대답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늘 있는 일은 아니야. 아주 귀한 경우란다.’
다행히 제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가 봅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습니다.
평균을 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너와 나의 기분이, 처지가 점점 더 비슷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