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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ul 25. 2022

고딩들의 블루스

몇 주전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가 손을 꼭 잡고 단지 안 산책로를 걷고 있던 젊은 청춘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이는 그 실루엣에 몹시 익숙한 겁니다. 바로 산책하러 나간다던 딸의 모습이었습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는 걸 보니 엄마가 맞긴 한가 봅니다.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200미터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괜히 내가 들킬까 겁이나 얼른 사잇길로 빠졌습니다. 참 이상하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제 발이 마음대로 숨는 걸까요. 달리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이는 산책에서 돌아와 휴대폰을 보며 킥킥거리고 있더군요. 


그리고 아이는 그 주 내내, 산책, 자전거 타기, 탁구 연습 등을 핑계로 매일 오후에 나갔습니다. 자전거는 삼십 분도 못 타고 들어오던 아이가 세 시간이 되도록 들어오지 않습니다. 맞아요, 맞아. 그 실루엣은 딸이 확실했던 겁니다. 자전거는 어디다 세워놓고 어디서 손을 맞잡고 있겠지요. 걷고 있겠지요. 벤치에 딱 붙어 앉아 셀카를 찍거나 같이 틱톡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겠지요. 


하교 후 단지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라면 누군지 감이 딱 왔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다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작은 학교라 한 반에 열댓 명 밖에 안 되는 반이 두 개, 그중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 그중 남자 친구가 될 만한 아이는 빤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확신은 금물이겠죠. 


그렇게 짐작만 한 채 얼마간 모른 척을 하고 있었는데, 이게 영 불편한 겁니다.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연애 얘기, 그것도 애들의 연애 얘기일 텐데, 그걸 계속 모른 척하자니 너무 아까운 겁니다. 그래서 벼르고 벼르다 날을 잡고, 또 산책하러 나간 아이에게 불쑥 문자를 보냈습니다. 엄마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단지 안 벤치에서 만나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말입니다. 도둑질하다 들킨 표정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난 아이를 앉혀 놓고 바로 말했습니다.


“사실은 말이야. 엄마가 예전에 달리기 하다가 네가 누구랑 손 잡고 걷는 거 다 봤어. 그게 벌써 몇 주 전인데, 그동안 모르는 척하느라 힘들었어.”


아이가 민망한지 우하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말합니다. 


“나도 그동안 거짓말하느라 힘들었어!!!” 그리고 묻습니다. “근데 언제 봤다고?” 


“언제더라? 월요일이었어. 아, 엄마 런데이에 날짜 있을 거야. 그래. 이 날이네!”


“악! 그날이 처음이었는데!!!” 그러면서 둘이 한참 웃었습니다.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첫 데이트부터 엄마한테 딱 걸리다니요.  


“그래, 너 그러고 날마다 나갔잖아. 자전거 탄다. 산책한다. 그런데 자전거를 세 시간이나 타는 게 말이 되냐?”


“안 되지.”


“근데 누구야?”


“비밀이야.”


하지만 결국 그 비밀을 캐냈습니다. 


“역시. 걔일 것 같았어! 암튼, 어차피 알게 된 거 나는 모른 척하는 거 힘들고 너도 거짓말하기 힘드니 우리 둘 다 그만 힘들자.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나가. 엄마가 못 나가게 하는 것도 아닌데.”


“알았어. 나도 날마다 다른 변명 생각하느라 힘들었어.”



그는 아이가 몇 년 전 사귀었다가 헤어졌던 친구였습니다. 그때는 둘 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기들이었는데, 이제 둘 다 훌쩍 커서 다시 만나는 겁니다. 그 사이 철이 들긴 했나 모르겠습니다. 그놈이랑 헤어질 때 그렇게 방에서 질질 짜더니 다시 만나는 걸 보면 썩 찌질이처럼 큰 건 아닌가 봅니다. 딸의 안목을 믿을 수밖에요. 듣기로는 헤어진 후에도 그놈이 쭉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 같은데, 뭐 그런가 보다 믿을 수밖에요. 


그리고 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잠시 쉬다가 당연하다는 듯 나갔습니다. 


“엄마, 나 나갔다 올게.”


“그래 얼마나 놀 건데? 밥 먹기 전에는 와.”


“알았어.”


그렇게 매일 밤 들어와 저녁을 먹을 때, 아이가 싫어할 줄 알면서도 묻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뭐했어?” 


그냥 걸었어. 그냥 벤치에 앉아 이야기했어. 어깨에 기대서 잤어. 등의 짧은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지만 그거라도 감지덕지해야겠지요. 어깨에 기대어 잤다는 건 좀 상상이 안 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집으로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별 것도 없는 반지 네 개. 사이즈를 잘 몰라 다양한 크기를 네 개나 샀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맞는 거 두 개를 골라 나눠 끼겠지요. 아무 장식도 없어 심플한데 두께는 좀 있는 반지였습니다.


휴대폰 바탕화면도 안 보여 줍니다. 어차피 코와 입은 마스크에, 이마는 머리카락에 다 가려져 보이는 거라곤 안경 뒤의 두 눈뿐인데 그것도 보여주기 싫어해서 한 번 보려면 얼마나 애타게 부탁을 해야 하는지 원. 참 치사하지 말입니다. 


연애가 좋을 때만 있겠습니까. 싸울 때도 있지요. 그럴 때는 비장하게 나갑니다. 오늘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며. 벤치에 앉아 말다툼을 하려나 봅니다. 그러다 또 너무 좋아서 어쩔 수 없이 화해해 버리기도 하겠지요. 아직은 그럴 때 아닌가요? 싸우고 있는데 보고만 있어도 너무 좋아서 싸우는 이유를 잊어버리는. 


싸울 때마다 사실 저는 좀 반갑습니다. 헤어지면 얼마나 펑펑 울지 모르니 헤어지지는 않을 정도로 건강하게 싸우면서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다른 게 싫지만 그래도 인정하고, 그 차이가 문제가 되지 않게 관계의 거리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고 있을 테니까요. 서로의 다른 가치관을 공유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그래도 인정하며 잠시 기다려보는, 그런 연습을 하고 있을 테니까요.  

좋은 사람을 알아보고 관계를 쌓아나가는 법, 서로의 우물을 나누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깊이에 다다르는 법, 그 안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있겠지만 다시 잘 빠져나오는 법, 그리고 다음번엔 조금 덜 허우적거리며 우아하게 들어갔다 나오는 법. 이런 것들은 말이나 글로 배울 수 없고 스스로 겪어 가며 배워야 할 테니까요. 아이는 지금 그런 인생 공부를 하고 있는 거겠지요. 학교에서보다 더 중요한 걸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며 매일 열심히 저녁을 차립니다. 조금 더 커서 저녁 데이트까지 하고 들어오기 전에요.


어두컴컴한 단지 내 정원에서 손잡고 걸으며 둘만의 비밀을 무럭무럭 만들겠지요. 걷다가 다리 아프면 벤치에 앉고, 밤은 오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면 뽀뽀도 하겠지요. 뽀뽀만 하겠습니까 당연히 키스도 하겠지요. 찌르르르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온 몸이 찌르르한 느낌을 이미 겪어보고도 남았겠지요. 그런 상상을 하며 밥을 차립니다. 거기서 더 이상 선은 넘지 말아라 주문을 외우며 저녁을 준비합니다. 그러다 아이가 상기된 뺨으로 돌아오면, 궁금해 죽겠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은 척 밥이나 듬뿍 퍼줍니다. 무럭무럭 자라라고요. 몸도 마음도. 





Photo by Roman Kraf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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