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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Mar 18. 2024

어느 주정뱅이의 변


작은 비닐봉지를 바스락바스락 들고 현관문을 열었어. 곧장 부엌으로 가서 500밀리미터짜리 스타벅스 텀블러를 꺼냈지. 딸깍! 비닐봉지에서 초록색 칼스버그 한 캔을 따 텀블러를 기울여 부어. 딸깍, 소리는 가능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 게 좋아. 또 마시냐는 핀잔을 듣거나, 마실 양만큼 딱 맞춰 사온 맥주를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거든. 


그리고 그 자리에 선 채 우선 한 모금 급하게 들이켜. 냉장고에서 갓 꺼낸 차가움은 사 오는 동안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다시 냉장고에 넣았다가 차가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거든. 그렇게 서서 한 모금을 쭉 들이키고, 혹시 술이 술술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두 번째 캔까지 따서 다시 가득 채워. 아, 시원하다! 그렇게 목을 축이고 나서야 어디 꿍쳐 놓은 감자칩이 없나 부엌을 뒤지기 시작하지. 아직 자리에는 앉지도 않았어. 안주는 새우깡도 좋고 냉동실에 있는 김도 좋아. 배가 고프지 않다면 맥주만 먹어도 좋고. 


바로 어제의 일이었어. 역시 딸깍 소리를 들은 남편에게 한 캔을 빼앗겼고. 왜 넉넉히 사지 않았냐고? 그에게는 꿍쳐 놓은 막걸리가 있었거든. 그런데 그걸 다 마시고 내 걸 또 마신 거지.  


다행히 한 캔만 빼앗기고 세 캔은 사수했어. 그래, 맥주 세 캔은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거였어. 당연히 더 마시고 싶었지. 그런데 더 사러 갈까 말까 하다가 게으름이 이겼어. 일요일 밤이라는 것도 한몫했고. 다음 날은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야 하는 월요일 아침이니까. 


백일 동안 금주를 한 적이 있어. 33일째에서 실패했지. 아니, ‘실패’라는 단어는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네. 그냥 ‘마감’을 했어. 책을 한 권 마감한 김에 금주도 함께 마감을 했어. 어떻게 했냐고? 우선 집 앞 식당에 가서 고추장찌개와 떡볶이를 시켰어. (윽, 둘 다 실패였어) 그리고 칼스버그와 좋은데이를 1:1로 말았지. 목구멍으로 콸콸콸 들이붓는데, 34일 만에 먹는 것 치고는 첫 잔의 감동이 썩 크진 않더군. 안 먹던 늦은 시간에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 소맥을 말고 있자니 ‘그래, 이게 사는 거지!’ 싶은 마음보다는, ‘그래, 술 마시는 거 별거 아니었지.’ 싶더라니까. 웃기지. 두 번째 잔부터는 소주 양을 줄여 말았어. 오랜만에 부어라 마셔라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이 건전한 나라 말레이시아는 술집이 너무 일찍 문을 닫느라 열 시도 전에 나와야 했지. 남편과 둘이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병을 비우고 말이야. 그리고 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맥주 세 병을 더 샀어. 집에 와서 2차를 했지.


다음날, 아침이 사라지고 없더군. 눈을 뜨니 12시가 넘어 있었어. 눈 뜨자마자 만난 오후가 얼마만이었는지 몰라. 남편은 이미 일하러 나가고 없고, 아이는 학원에 가기 전에 밥을 달라 하네. 알아서 먹으라 했더니 밥을 푸고 계란을 부쳐 마요네즈와 고추장을 찾아. 남편에게 연락이 와. 도시락은 안 오는 거냐고. 앗, 술 마시면서 도시락 싸다 준다고 약속을 했나 봐. 전혀 기억이 없어.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보니 메뉴가 잘 적혀 있네. 두부조림과 계란말이. 도시락은 못 싸간다, 미안하다 말하고 다시 누웠어. 몸은 힘들고 잠은 안 오고, 중간중간 아이의 픽드롭 때문에 운전은 해야 하는데 속이 울렁울렁. 맞아. 숙취란 건 그런 거였지.


애초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바로 그거였어. 언젠가부터 마시기만 하면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났거든. 그런 현상이 잦으면 치매로 이어질 수 있다는 끔찍한 기사도 읽었고. 그리고 점점 더 적은 양의 술로도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했어. 술을 마시면 도파민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지는데, 마시면 마실수록 같은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필요한 술의 양은 늘어난다고 해. 맞아. 처음에는 작은 캔 두어 개 정도면 기분이 좋았는데, 나중에는 그걸로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상태가 되었지. 큰 캔 두어 개로 늘어났다가 막판에는 큰 캔 네 개까지 꿀떡꿀떡 마시게 되었어. 그제야 조금 마신 것 같고, 그럴수록 기억은 더 자취를 감추고. 결국 밤의 기억과 아침의 시간을 동시에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었어. 세상에 하루가 얼마나 짧아진 거야. 그리고 어느 날 샤워를 하다가 깜짝 놀랐어. 배가 말이야. 나도 모르게 둘째가 6개월은 자라 있는 것 같았거든. 바지가 하나씩 작아진 지는 오래, 고무줄 바지와 치마로 연명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배가 후덕해져 있었어. 이러다 금방 배불뚝이 치매 노인이 될 것 같아 두려워졌지.  


하지만 금주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매일 술을 마시지 않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야. 습관처럼, 그냥 오늘 하루 잘 보냈으니까 한 잔, 유난히 힘들었으니까 한 잔, 비가 왔으니까 한 잔, 딸이 속을 썩였으니까 한 잔, 남편이 마시니까 같이 한 잔, 구실은 끝이 없지. 


주중에는 마시지 말자 싶어 월요일에 얌전히 잠자리에 들면, 화요일은 해가 떨어지기 전부터 몸이 외쳐. 혈중 알코올 농도 급강하, 삐뽀삐뽀, 알코올 투입 요망, 삐뽀삐보! 


그러다 네 시쯤이 되면, 아이를 학원에 내려주고 바로 옆 슈퍼로 가. 한 시간 반 후에 픽업을 하면 되니까 그 사이에 한 캔은 마실 수 있거든. 하루 쉰 것뿐인데 일주일은 쉰 느낌으로 또 새롭고 청량한 마음으로 술을 마셔. 그렇게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저녁을 하면서 한 캔을 서서 마시고, 저녁을 먹고 또 한 캔을 마시고, 쉬었다가 설거지를 하고 나서 또 한 캔을 마셔. 막 취해서 다음 날 힘들지는 않아. 그렇게 매일, 조금씩, 하지만 점점 많이. 지갑은 텅텅 비어 가고, 맥주캔 으스러뜨리는 소리가 마시지 않아도 귓가에 아른거리는 지경에 이르렀지. 


와인도 즐겨 마셨어. 처음에는 반 병 정도면 적당히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지고 가족들에게도 여유로워졌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 병을 다 마셔야 그런 상태가 되더라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 여유로운 상태로 뭘 했는지 아무 기억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멸치 같은 상태로 눈을 떠. 그래서 한 번은 정말 이러면 안 된다 싶어 모든 의지력을 끌어모아 3분의 2 정도를 마시고 냉장고에 잘 넣어 놓았어. 그래, 나도 적당히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야! 하면서.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떴는데, 침대에 앉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뭐게?


아, 어제 남겨 놓은 와인 마시고 싶다. 


아침부터 말이야. 밖에는 새가 지저귀고, 저 멀리 수영장 물소리가 졸졸졸 들리는 화창한 아침에, 어제 남겨놓은 와인을 마시고 싶었어. 우두커니 앉아 생각했지. 문제다, 문제. 


하지만 금주는 그로부터 1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겨우 시작한 거야. 그리고 그동안 와인 한 병은 하룻밤에 다 비우는 것이 당연한 정도로 양이 늘었고. 남편이 한 잔이라도 마시면 두 병을 못 사다 놓은 것이 분해 어쩔 줄 몰랐고. 


태어나서 술을 마시지 않은 기간보다 술을 마신 기간이 훨씬 길어진 지금 돌이켜 보면 말이야. 술을 마시며 인생이 더 재밌어졌고 자유로워졌고 여유로워졌지. 더 멋진 사람이 되었고 더 많은 친구가 생겼어. 베프도 그렇게 만났고. 연애에도 술이 빠지지 않았지. 삶은 리드미컬했고 긴장과 이완이 조화로웠어. 빛나는 청춘도, 치기 어린 반항도, 멋진 추억도, 애틋한 기억도 모두 술과 함께였어. 심지어 더 여유롭고 느긋한 엄마가 되는데도 좋았지. 


동시에 흑역사도 차곡차곡 쌓였고, 간은 제 기능을 점차 잃어갔고, 뇌는 지쳐갔지. 남편과는 영 대화가 안 통해 평소에 자연스럽게 말을 섞지 못하고 꽁 하다가, 술만 마시면 그렇게 싸웠고. 그렇게 술을 마시느라, 술을 깨느라 버린 세월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나물 무쳐 뿌리는 깨소금처럼 삶을 빛내주기도 했고, 실수로 가득 부어버린 소금처럼 인생을 짜게 만들기도 했던 술이 그렇게 점점 나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어. 매일 밤, 맥주 혹은 소주 혹은 와인을 중심으로 모든 일정과 기분과 체력이 좌우되는 삶이 되었지.


그래서 결심하게 된 거야. 남산만 한 배를 좀 집어넣고, 위와 간에게 쉴 시간을 주고, 자꾸 깜빡깜빡하는 뇌도 좀 쉬게 해 주자고. 줄여보자! 는 마음은 아무리 굳게 먹어도 해만 지면 공중분해 되어버렸기 때문에 급기야 당분간 만이라도 끊어보게 된 거지. 그렇게 33일을 보냈어. 다행히 정말로 중독된 상태는 아니었나 봐. 금단 증상으로 힘들지는 않았으니까. 


자, 그렇다면 술을 끊고 33일 동안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낫띵! 억울하게도 정말 낫띵!이었어. 조금 더 늘어난 시간에 비슷한 일들을 조금씩 더 많이 하게 된 게 전부랄까. 술 마시며 보던 넷플릭스, 술 마시며 읽던 책을 술 없이 조금 더 보고 읽게 된 것뿐이랄까.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이야!라고 외칠 만큼 상쾌한 상태로 아침에 눈이 떠지는 것도 아니고, 뱃살이 드라마틱하게 확 들어가더라, 뭐 이런 일도 없었고. 


다만, 나도 한다면 할 수 있는 사람, 아니, 한 달 정도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지. 스무 살 이후, 임신과 수유 기간을 제외하고 자발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은 것으로는 최장의 기록이야. 술을 마시며 자책하고 후회하던 길고 긴 세월 후, 눈곱만큼의 자기 효능감이 생겼달까. 이번에는 33일 금주를 했으니 다음에는 44일 금주도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자, 여기까지가 나의 금주 이야기야. 우리 모두에게 그런 습관이 있겠지? 버리고 싶은 습관, 그리고 익히고 싶은 습관. 습관이 인생이 된다고 하잖아. 우리 인생은 원대한 꿈보다 매일의 습관이 좌우한다는 걸 이제는 알아. 어린 시절부터 그 꿈을 위해 바른 습관을 들였던 바람직한 청춘이었다면 지금쯤 삶이 달라졌을까. 젊음은 예측불가능해야 제 맛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최대한 누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어. 매일의 습관 따위 없었지. 해가 지면 즐겁게 술 마실 생각을 하는 걸 제외하면. 결국 그 아름답지 못한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 고리를 끊고자 큰 결심을 했고, 덕분에 한 달이나마 새로운 습관을 들여볼 수 있었어.  


자, 그럼 44일의 금주는 언제 또 시작해 볼까?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애써 날짜를 세지 않아도 기념하고 싶은 날이나 기억하고 싶은 날에만 가볍게 한 잔 걸칠 수 있는 바람직한 음주 습관이 몸에 익겠지? 하지만 모르는 일이야. 44일 금주도 일 년쯤 뜸 들이기가 필요할지. 내가 원래 생각은 많지만 시작이 좀 어려운 사람이라서 말이야. 그래서 오늘도 맥주 한 캔 마시려고. 우리 같이 마실까?






사진: UnsplashThomas Fran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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