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레일을 타고 마지막 서큘러키 정거장에서 내린다. 커다란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 간단한 배낭을 멘 사람들, 예쁘게 차려입고 어깨에 핸드백을 맨 사람들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움직인다. 거기서 조금만 걸으면 바다 건너 오페라하우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사람들이 전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있다.
오, 맛있겠다. 얼마나 할지 우리 한 번 맞춰볼까? 아이에게 말했다.
음, 한 8달러?
어디 한 번 가서 보자!
짜잔! 막대 아이스크림 하나에 12달러다. 무려 만이천 원.
하지만 오페라 하우스 모양 아이스크림이 아닌가. 하버 브리지 모양도 있고. 맛이야 바닐라나 초코가 거기서거기겠지만 어쩌면 태어나 딱 한 번 먹게 될 아이스크림 아닌가. 오페라 하우스 모양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어야지. 안 그래? 하면서 12달러를 긁었다. 카드로 긁었더니 가격이 조금 더 오른다. 결국 고른 건 초코맛 하버 브리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오페라 하우스가 시원하게 보이는 곳에 앉기 좋은 둥근 벤치가 있다. 마침 자리가 비어 얼른 엉덩이를 들이민다.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사람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고개를 까딱이며 음악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책 읽는 사람들.
아이가 꺼낸 책은 시드니 대학교 탐방을 끝내고 근처 글리브 북스에서 산 <Seven and a half lessons about the brain>. 여행 갈 때는 책도 신중하게 골라가지만 가서도 한두 권은 꼭 산다. 여행지에서 사거나 읽은 책은 특별히 더 기억에 남으니까. 보통 장르에 상관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편인데 언젠가부터 여행지에서도 아이가 읽을 만한 책만 사고 있다. 그래서 글리브 북스에서도 나 혼자였다면 쓱 지나치고 말았을 코너 앞에 아예 주저앉아 책을 골랐다. 바로 과학 코너에서 말이다. 물리나 화학 같은, 도대체 이해도 암기도 되지 않아 나는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던 과목들을 아이는 아주 신나게 공부하고 있다. 나와는 완전 다른 종이다. 덕분에 내가 과학책 코너에서 책을 고르는 날도 온 것이고.
엄마, 이 책 어떨 것 같아?
한글 책이라면 어떤 책인지 금방 파악하는 내공이 있지만 영어 책은, 음, 좀 어렵다. 다행히 자주 애용하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영어로 제목을 치면 대부분 한글 번역본이 짠 나타난다. 아이가 고른 책은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휘리릭 파악을 끝낸다.
둘 다 내용은 비슷하고 평도 괜찮네. 그런데 이 책 말고 저 책 사자. 뇌과학은 아무래도 최근 책이 더 나을 것 같아.
그렇게 산 책을 오페라 하우스 앞 벤치에 앉아 살랑살랑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읽고 있었다. 아이가 갑자기 말한다.
나는 역사도 좋아하고 재밌어했는데 (한때 역사책만 사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다 온통 과학만 공부하게 되었을까?
하하하. 엄마 말을 안 들어서 그렇지! 물론 농담. 그럴 수도 있지. 원래 인생은 사소한 선택 같은 것으로 몇십도 씩 방향을 바꾸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러다 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인생이야. 게다가 넌 아직 어리잖아. 네 삶은 앞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 지금은 상상도 못 하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고. 그래도 일단 선택한 공부를 잘해 놓으면 나중에 그것과 상관없는 삶을 산다고 해도 어떻게든 네 삶에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한동안 책도 읽고 이야기도 나누다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하이드 파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억 속 하이드 파크는 낯선 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곳이었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혹은 호텔에서 일을 마치고 슬렁슬렁 걸어와 벤치에 앉아 있으면 개를 산책시키던 할머니나 퇴근길의 아저씨가 말을 걸었고 그렇게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어디서 왔니, 시드니에서 뭐 하니 등의 기본적인 대화를 주로 나누었는데 그러다 말이 잘 통한다 싶으면 대화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같은 주제로 급발진하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가장 큰 고민과 상처와 꿈과 다짐들에 대해 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대학을 졸업한 어른이었지만 아직 영어를 더듬거렸고 그래서 자기 생각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애송이 취급을 받는다고 종종 느꼈다. 나의 경험과 생각은 이미 어른의 것인데 단지 그것을 말로 유창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어른이 아닌 애송이가 맞았다) 하지만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 역시 어른스러운 내 이야기를 조금은 꺼내 놓을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내가 진짜 일 인 분의 어른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지금, 그때 어른이고 싶었던 나는 아직도 내가 진짜 어른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 옆에는 조금만 더 크면 곧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애송이가 있다. 그 애송이에게 물었다.
넌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
아이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차분하고 단단한 어른이 되고 싶어.
그래?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면?
주변 상황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어떤 일이 생겨도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 뭐 그런 뜻?
오, 그런 사람 멋진데? 그런 어른이 되고 싶은 이유가 있어?
이유는 잘 모르겠고.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대로 살고 싶어. 정신없이 몰아치며 사는 건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아. 그리고 지금은 모르겠지만 어른이 되면 될수록 힘든 일이 더 많아질 거 아니야. 그럴 때는 차분하고 단단해야 무너지지 않고 그런 상황들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오, 그렇겠네. 그런데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엄마가 딱 그런 사람 같지 않니?
하하. 조금 인정. 하지만 엄마는 단단해도 너무 단단하고 아빠는 반대로 또 너무 유연해. 그 중간이 딱 좋을 것 같아.
그래, 어느 쪽으로든 너무 치우치는 건 별로지. 너는 엄마 아빠 절반씩 닮았으니까 적당히 섞여서 잘 클 거야. 믿어!
이십 년 전 하이드파크에서 사람들과 더듬더듬 이야기하던 때로부터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그 쏜살같은 시간 속 어느 순간 이 아이가 내게 왔고 함께 아장아장 무럭무럭 시드니까지 왔다.
괜찮은 어른인지 부족한 어른인지 모르겠는 한 사람과 아직 애송이인지 벌써 어른인지 모르겠는 한 사람이 하이드 파크의 푸르른 햇살을 사이좋게 걸었다.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하다. 여행의 피로가 쌓여 하루쯤 쉬어 줘야 할 때인가. 세탁기 한 번 건조기 한 번 돌리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도 피곤해 오늘은 너구리다. 게다가 라면은 내가 안 끓인다. 어른답게 라면도 잘 끓이는 여행 메이트가 있으니. 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