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안 훔쳤다고요!
띠리 리리. 띠리 리리.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보통은 눈이 떠질 때 일어나지만 여행 중 처음으로 알람을 맞췄다. 오전 중에 두 군데의 벼룩시장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로젤 콜렉터스 마켓. 워킹 홀리데이 시절 토요일마다 일했던 주말 마켓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어쩌면 요즘 시드니에서 가장 핫한 글리브 마켓.
아이도 나도 기분이 좋다. 나는 이십 년 만에 옛 직장(?)을 찾아간다는 설렘으로, 그리고 아이는 두 탕의 벼룩시장 투어에서 엄마가 지갑을 후하게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말이다.
여전히 날씨는 추워서 아침부터 한국에서 싸 온 육개장과 짜장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섰다. 어디서 버스를 타고 다녔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우리에겐 구글맵이 있으니 못 찾아갈 곳은 없다.
그렇게 도착한 나의 옛 일터.
시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과거로 시간 여행이다.
존 아저씨의 천막이 있던 곳, 내가 열심히 일하던 곳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젊었던 내가 앞치마를 메고 머리에는 록스마켓에서 산 무지개색 머리띠를 하고 씩씩하게 웃으며 빵에 버터를 바르고 베이컨과 소시지를 굽고 서니사이드업으로 계란을 부치고 있다. 손님들과 수다도 잘 떨고 그 와중에 머릿속으로 돈계산도 척척 해내는 능력 있는 직원이 바로 나였다. 존 아저씨가 나의 그 능력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나는 그저 암산을 좀 했을 뿐인데 대단하다고 난리였지.
그러다 점심때가 되면 베이컨 앤 에그롤과 소시지롤 중 하나를 골라 먹고 시간이 남으면 시장을 돌아다니며 옷도 구경하고 남의 손때 묻은 반지도 구경했다. 그러다 다시 나의 일터로 돌아오면 우리 천막 바로 옆에 있던 아이스크림 트럭의 니노 아저씨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뽑아 초코 시럽에 푹 담가 건네주었다. 매주 토요일의 행복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열심히 일해 나를 먹이고 살리는 중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이스크림 하나로 행복해지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혹시 자리를 바꾸었나 싶어 마켓 전체를 둘러보았지만 존 아저씨는 없다. 나이가 많아 일을 그만두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아쉽다. 존 아저씨보다 어렸던 니노 아저씨는 어쩌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했으나 그의 흔적도 없다. 일찍 은퇴하고 아이스크림 트럭을 개조해 캠핑하는 삶을 살고 있으려나. 추억의 무대는 남아 있지만 추억의 인물들은 사라진 곳에서 아쉬워하는 엄마 마음도 모르고, 저 혼자 벼룩시장 보물 찾기에 신이 난 아이가 엄마를 부른다. 그래, 추억 찾기는 그만하고 보물 찾기나 하자.
엄마, 이거 어때? 이쁘지? 가격도 괜찮아!
그래, 이쁘네. 얼마야?
하지만 아무래도 아쉽다. 마침 아이가 사고 싶어 하는 시계 매대의 주인은 할머니였다. 왠지 그녀라면 존 아저씨를 알지도 모른다.
저 죄송하지만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여기서 얼마나 장사하셨어요?
아유, 오래 했죠. 한 삼십 년 했나?
아, 그럼 혹시 존과 셰리를 아세요? 저기 저쪽에서 베이컨앤에그롤, 소시지롤 같은 걸 파셨는데.
누구요?
존은 오지 아저씨였고 셰리는 아시아계 아주머니였어요. 이십 년 전쯤 주말마다 여기 오셨었는데 혹시 모르세요?
아, 기억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만 나온 지 한참 되었어요. 육칠 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아 그래요? 생각보다 일찍 그만두셨군요. 혹시 연락처 같은 건 모르시겠죠?
아유, 몰라요.
할머니한테서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시계를 하나 사고 돌아선다. 그래, 할머니들 보다는 할아버지들이 존을 알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다. 마침 각종 액세서리를 꺼내 보기 좋게 진열하고 있는 할아버지가 있다. 쓱 다가가 구경하는 척하는데 유쾌하게 말을 건다.
안녕, 아가씨들. 여기 이 팔찌 어때? (자기 팔목에 걸치며) 자, 여길 봐요. 이게 바로 제뉴인 페이크 구찌야.
아이와 다 같이 하하하 웃었다. 한눈에 짝퉁임을 알아볼 수 있는, 그야말로 순정 짝퉁 다웠다. 이때다 싶어 아저씨에게도 물었다.
혹시 저 쪽에서 베이컨앤에그롤 팔던 존 아저씨 아세요?
존? 모르겠는데?
여기서 얼마나 장사하셨어요?
한 오 년 됐나?
시계 할머니가 육칠 년 전부터 안 나온 것 같다고 했으니 겹치는 시기가 없다.
아, 그럼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마침 지나가던 여자 손님이 발걸음을 멈춘다.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또 다른 제뉴인 페이크를 자랑하며 수다를 떨길래 우리는 이것저것 손가락에 끼워보고 팔목에 둘러보다가 말없이 자리를 떴다.
누구한테 더 물어볼까? 가게마다 물건을 파는 할아버지들이 제법 많았는데 세월의 연륜과 주름이 다소 무섭게 자리 잡은 것 같아 선뜻 말이 걸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할아버지들 얼굴만 살피며 애꿎은 벼룩시장만 몇 바퀴 돌고 있었다.
그때 어디론가 급히 가던 제뉴인 페이크 구찌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내 팔찌 내놔!
뭐라고요? 우리는 둘 다 자동으로 소매를 걷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안 가져갔거든요!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다행히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섰다.
아니, 지금 우리 도둑 취급받은 거잖아! 다른 손님하고 이야기하고 있을 때 몰래 가져가기라도 했을까 봐! 참나 기가 막혀서! 친절한 할아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만. 잠깐, 지금 이거 인종차별인 거야?
아이랑 둘이서 붉으락 푸르락 했지만 딱히 어쩔 것인가. 우리가 안 가져갔다니 그냥 말없이 가버렸는데. 그렇게 존과 셰리는 찾지도 못하고 도둑 취급만 받고 로젤 마켓을 나섰다. 발걸음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존 아저씨와 셰리 아줌마의 추억 위에, 베이컨앤에그롤과 니노 아저씨의 초코 아이스크림 추억 위에, 도둑인 줄 알고 우리를 찾아 마켓을 헤매고 다녔을 짝퉁 구찌 할아버지의 추억이 더해진 곳이 바로 로젤 마켓 되시겠다. 내가 죽기 전에 다시 여기 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다음 목적지는 글리브 마켓. 역시 규모도 훨씬 크고 가게도 사람도 음식도 훨씬 많다. 아낌없이 지갑을 열어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사고 싶은 것도 없다. 소유보다 무소유의 즐거움이 더 큰 것을 알아버렸으니. 물건을 사다 보면 주인들이 종종 말을 거는데 내가 대화를 할 수도 있지만 왠지 아이에게 넘기게 된다. 말하자면 어릴 때 천 원짜리 한 장 쥐어주고 집 앞 슈퍼에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와볼래? 하는 기분이랄까. 낯선 사람을 만나면 엄마 바짓자락을 잡고 뒤에 숨던 아이가 어엿한 어른이 되어 낯선 사람들과 스몰톡도 잘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
벼룩시장 투어를 마치고 숙소 근처 서리힐로 가서 베트남 식당 쌀국수를 먹고 코울스에서 장을 보고 달콤한 낮잠을 잤다. 아침은 부지런했으니 오후는 게으르게. 일찍 일어나 피곤하기도 했지만 추위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겨울 여행은 가성비가 참 별로다. 하루 종일 빨빨거리고 돌아다녀도 아까울 판국에 툭하면 춥다고 집으로 달려와 이불을 파고드니 말이다. 한숨 자고 일어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빨래도 하고 책도 읽고 저녁으로 라비올리를 삶아 먹었다. 내일이 시드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