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Oct 10. 2024

본다이 비치에서 싸우는 커플은 누구인가



트램을 타고 또 버스를 타고 본다이 비치로 가는 날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푸르른 바다가 지척이다. 해변에서 5분 거리인 숙소에 우선 짐을 맡기고 바다가 보이는 브런치 카페에 앉았다. 역시 파도를 타는 사람들의 식사는 다르구나. 시드니보다 양이 훨씬 많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차다. 찐 겨울이다. 


기억 속 본다이 비치,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서 본 본다이 비치와 지금 내가 있는 본다이 비치는 얼마나 다른가. 나는 얼마나 헛된 꿈만 꾸었는가. 겨울의 시드니 날씨 따위 생각도 하지 않고 비키니를 입고 해변에 누워 일광욕을 할 거라고 상상의 나래만 펼쳤지. 매일 다른 수영복 입겠다고 수영복을 더 사 오지 않은 건 얼마나 잘한 일이었는지. 그나마 한 벌씩 챙겨 온 수영복은 캐리어 가장 구석에 꽁꽁 넣어 (여행 내내 입지 않을 옷을 위한 캐리어가 하나 생겼다) 꺼낼 일도 없다. 비키니 대신 우리는, 한 명은 두터운 겨울 점퍼를, 또 한 명은 얇은 티셔츠, 그 위에 얇은 가디던, 그 위에 두툼한 가디건이나 스웨터, 그 위에 넉넉한 후드, 그리고 그 위에 패딩 조끼까지 껴입고, 모래사장에는 내려가지도 않고 바다가 멀리 보이는 브런치 카페의 야외 천막 아래 웅크리고 앉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든든히 먹었으니 추워도 산책을 좀 해야겠지. 길을 건너 모래사장 가까이 내려간다. 모래사장을 따라 알록달록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맞바람을 뚫고 걸으며 벽화도 파도도 대충 구경한다. 그렇게 해변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기념품 샵도 구경한다. 시드니보다 엄청나게 비싸다. 아직도 방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바닷가 앞 비탈 잔디에 사롱을 깔고 앉았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책도 읽고 듀오링고도 하면서 (아이는 독일어를 나는 스페인어를 하고 있다) 겨울 햇빛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겨우 숙소에 입실. 작고 예쁜 부티크 호텔이다. 깔끔한 체인 호텔보다 주인의 취향이 묻어나는 이런 호텔이 더 좋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방인지 한기가 가득하다. 방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귀여운 히터를 틀고 따뜻한 차를 한 잔 타서 겨우 발만 데워주는 히터 옆 흔들의자에 앉았다.


흔들흔들 몸을 녹이며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까뮈의 <이방인>을 영어로 읽는 중이다. 마침 주인공 뫼르소는 마리와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바다에 누워 수영을 즐긴다. 머릿속에서는 알제리의 태양이 이글거리는데 현실의 나는 바다를 지척에 두고 히터 옆에서 몸을 녹이며 대리만족이나 하는 중이다.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해변에 와서 호텔에 처박혀 따뜻하게 바다 수영을 하는 주인공들을 질투하게 될 줄이야. 


그러다 질투심을 가라앉히고 그동안의 여행을 돌아본다. 시드니에서 일주일을 보냈고 이곳 본다이 비치에서 2박 3일을 보내고 나면 다시 멜버른에서의 일주일이 기다리고 있다. 2주가 조금 넘는 이 시드니 멜버른 여행은 우리 모녀에게 무슨 의미일까. 여행에 무슨 의미가 있어 그냥 즐겁게 지내다 가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말도 맞다. 나 역시 어떤 여행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놀기만 한다. 하지만 시드니라면 다르지. 


그저 죽죽 흘러가는 것 같은 삶에도 중요한 마디가 되어주는 시기는 분명 있다. 그 시기를 지나며 삶은 더 깊어지거나 넓어지거나 어떤 모양으로든 변형된다. 지금이 그런 시기임을 선명히 인지한 채 그런 시기를 보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보면서 그때가 그런 시기였음을 깨닫기도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자였다.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위해 시드니에 도착한 첫날부터, 이곳에서의 일 년이 내 삶의 전환점이 될 것임을 알았고 그래서 하루하루 더욱 충실히 살았다. 줄어드는 날짜가 아쉬울 정도로 매일을 알차게 보냈다. 


그렇게 시드니에서 배운 새로운 삶의 방식들로 나는 더 나다운 내가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그 모습을 잊지 않은 채, 혹은 지켜가려고 노력하며 이후의 세월을 살았다. 나중에 발리에서 살게 된 것도, 그리고 지금 조호바루에서 살고 있는 것도 어쩌면 그 뿌리는 시드니에서 자라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어쩌면 그 시절이 그리워서, 어떻게든 튼튼한 뿌리를 만들려고 애쓰던 앳된 청춘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 여행은 치열하고 아름다웠던 생의 한 시절을 다시 찾아 떠난 ‘노스탤지어로의 여행’ 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이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마지막 일 년을 불태우기 전, 잠시 숨을 고르는 ‘휴식으로의 여행’이자, 대학들을 탐방하며 새로운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점쳐보는, 어쩌면 ‘각성으로의 여행’ 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둘이 하는 마지막 긴 여행이 될지도 모르고)


말하자면 나는 나의 과거를 만나기 위해, 아이는 제 미래를 그려보기 위해 떠난 여행인 것이다. 시드니에서 보낸 일주일이, 그리고 멜버른에서 보내게 될 일주일이 바로 그 과거와 미래 사이의 찬란한 현재다. 그렇게 하나의 여행에 각자의 의미를 담고 두 도시 사이에 잠시 쉬어가기 위해 ‘휴식으로의 (여행 속) 여행’을 위해 본다이 비치에 온 것이다. 


(‘노스탤지어로의 여행/휴식으로의 여행/각성으로의 여행’이라는 용어는 정신과 의사 문요한의 책 <여행하는 인간>에서 소개된 개념임을 밝힌다)  


하지만 여행의 의미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좋아도 호주의 겨울 날씨는 좋지 않다. 여행의 의미를 돌이켜보다가 그새 또 추워져 몸을 웅크린다. 결국 이불을 파고들었다가 아이도 나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깐 자고 일어났는데 벌써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서둘러 저녁거리를 사러 나가려는데 한 번 나가려면 몇 벌의 옷을 껴입어야 하는지 모른다. 외출 전 거울을 보며 셀카 찍기를 좋아하는 아이 옆에 몇 번 섰다가 도저히 찍힐 몰골이 아니어서 얼른 비켜서기가 며칠 짼가. 


어둠에 추레함을 감추고 마트에 들러 먹거리를 샀다. 마침 본다이 페스티벌 기간이다. 추위에 적응 못한 여행자들은 흥도 나지 않는데 사람들은 두툼한 옷을 껴입고 신나게 스케이트를 탄다. 굳이 이 추운 겨울에 페스티벌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마저 없으면 여기가 얼마나 썰렁하겠는가. 그 유명한 아이스버그 수영장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개운하게 씻었다.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 추우면 잘 씻지도 않게 된다.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시드니보다 훨씬 쾌적해진 화장실에서 진짜 오랜만에 씻었다. 그리고 아까 그 흔들의자에 앉아 오천 원짜리 미니 와인을 홀짝이며 까뮈의 책 속 바다로 건너가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행복하긴 한데 하루가 허무하기도 하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을 테니 당연히 여행 중에도 그런 날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옆에 누운 아이가 또 남자 친구랑 통화를 한다. 요즘 나는 태어나서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듣고 있다. 물론 옆에 있지도 않은 남편이 해주는 말은 아니고, 아이가 내게 하는 말도 아니다. 아이가 남자친구에게 하는 사랑한다는 말을 옆에서 주워듣는다는 말이다. 그걸 일주일째 매일 듣고 있다.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왜 그런 거 있잖나.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내가 더더 사랑해. 


먼저 끊어. 

네가 먼저 끊어. 

그럼 동시에 끊어. 하나 둘 셋! 

아, 왜 안 끊었어. 

너도 안 끊었잖아.


알았어. 잘 자, 사랑해. 

나도 사랑해의 무한반복.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심상찮다. 다른 버전의 대화가 들려온다. 자는 척하며 조용히 들어본다. 


화났어?

화 안 났어.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 화난 것 같아. 

화 안 났다니까?


알았어. 

… 


그런데 진짜 화 안 난 거 맞지? 

아니라고. 

아무래도 화난 것 같아.

아니라니까!!!


이런 식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실랑이에 내가 나서 준다. ‘아 잠 좀 자자!’ (평소에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그날은 끝없는 오해의 지옥에서 두 아이들을 꺼내주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을 뿐!) 그리고 생각한다. 참, 좋을 때다! 싱그러운 청춘이구나! 


이제 좀 조용하다. 시드니에서는 자려고 누우 있으면 숙소 바로 앞 신호등에서 뚜루루루 소리가 다정하게 들렸는데 새로운 호텔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매일 듣던 소리가 없으니 허전하다. 굳이 그 소리를 상상하며 아이스 스케이트장도 집어삼킨 본다이의 시커먼 밤처럼 눈을 감았다. 

이전 10화 전광판에 우리 얼굴이 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