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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Oct 17. 2024

본다이 비치, 책방에서 펍까지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독립 서점 거투르드 앤 앨리스. 넓지 않은 공간에 책이 가득하다. 중간에 놓인 둥근 테이블의 한가운데에도, 일인용 소파 주위에도, 벽에는 천장까지 여기저기 쌓여 있고 꽂혀 있다. 한국의 서점들이 단정하고 보기 좋게 책을 진열한다면 거트루드 앤 앨리스는 여백의 미라고는 없는 맥시멀리스트의 방 같다. 계산대 위도 다를 바 없다. 쌓인 책들 너머로 돈을 주고받고 음식과 음료가 날아다닌다. 새 책에 컵에 묻은 물이라도 한 방울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사람은 나뿐인 듯하다. 그 작은 책방에 손님들이 꽉 찼다. 가장 커다란 테이블은 중앙에 책에 가득 쌓여 빙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는 딱 노트북 하나만큼의 공간만 허락된다. 오래 앉아 작업을 하기에는 적당치 않아 보인다. 작업을 하다가도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서둘러 노트북을 치워 공간을 마련해야 할 듯. 그 옆의 작고 둥근 테이블 위에도 새 책들이 쌓여 있는데 나이 지긋한 두 여인이 그 새 책들 바로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침부터 경쾌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서점 안에 카페가 있더라도 책들이 있는 공간과 철저히 분리되는 편인 한국의 서점들과는 다르다. 좁은 공간을 책들과 사람들이 알뜰살뜰 공유하고 있는데 그 조화가 몹시 자연스럽다. 누구도 좁거나 불편하다고 투덜대지 않고 어떤 책들도 구겨지거나 젖거나 더럽혀지지 않는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좁은 통로를 조심조심 걷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교정을 봐서 넘겨야 할 원고가 있었다. 오늘쯤 마무리해서 보낼 생각으로 노트북을 들고 나왔는데 테이블 회전을 위해 오랜 작업은 지양해 달라는 멘트가 붙어 있다. 게다가 아보카도페타치즈 토스트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서 먹고 나니 배가 불러 노트북을 켠다고 활자가 눈에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운 좋게 자리 잡은 커다란 일인용 소파에 파묻혀 책방 손님들이나 구경했다. 조그만 여자 아이가 엄마와 함께 그림책을 펼쳐놓고 한 단어씩 읽고 있다. 이제 막 읽기를 배우고 있는 듯하다. 오빠는 구석에 앉아 학습 만화를 읽고 있다. 하지 말라는데 굳이 노트북을 펴놓고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내 딸이다. 아이는 옆의 일인용 소파에 앉아 대학 입시에 필요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조금만 쓰고 금방 일어났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인간으로 키워놓으니 참 좋다. 책 읽는 즐거움과 여행의 즐거움만은 알게 해주고 싶었는데, 마침 함께 떠난 여행에서 함께 책방에 앉아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참으로 만족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공부하느라 바빠 예전만큼 책을 읽지는 않지만 읽어보라고 들이미는 책은 거부하지 않는 데다가 여행 중 책방 투어를 따라다니는데도 불만이 없다. 바깥의 바닷바람은 춥든 말든 지금 이 안락한 책방의 가장 편한 의자에 등을 파묻고 앉아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쌓인 책들이 전부 한국 작가들의 책이다. 자세히 보니 어제까지 코리안 위트 특별 주간이었네! 본다이 비치에 와서 <82년생 김지영>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H 마트에서 울다> <파친코> 등을 만나다니. 시드니에서 본다이까지 한국 문화의 점령이 대단하다. 


며칠 전 시드니에서도 그랬다. 오래간만에 한식을 먹으려고 한국 식당을 검색했는데 우리가 서 있는 곳 반경 500미터 내의 한국 식당 예닐곱 군데 모두 손님들의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춥고 배고파 오래 기다리기는 싫었는데 그나마 실내에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곳을 한 군데 찾았다. 아주 오랜만에 삼겹살 이인분과 소주 한 병! 혼자 한 병을 다 마시기는 힘들 것 같아 남으면 들고 가려고 했다. 소주를 가져다준 직원이 우리 앞에서 뚜껑을 따주었고 그걸 당연히 테이블 위에 두겠거니 생각했는데 뚜껑이 보이지 않는다. 따자마자 병뚜껑을 증발시켜 버리는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그래서 내가 물었다. 


뚜껑 혹시 어디다 두셨어요?


그랬더니 대답이 놀랍다.


뚜껑은 드릴 수 없어요.

왜요? 남으면 가져가려고 하는데요.

시드니에서는 술병을 들고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법이 그래요.

어머, 그래요?


다 먹긴 힘들 텐데 아깝도다. 또 하나 배웠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그래, 한국 문화의 침투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소주 뚜껑 이야기까지 가버렸구나. 어쨌든 서점에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서는데 성근 빗방울이 떨어진다. 일광욕은 못할 망정 본다이 비치에서 비까지 맞아야 한다니. 집엔 들어가기 싫고 그럼 뭐 하지? 그러다 생각난 곳이 있다.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에 갔을 때 마침 리노베이션 기간이라 가보지 못한 휴먼디지즈 박물관이다. 물론 아이의 취향이고. 나의 책방 투어에 함께 해줬으니 사람의 위장과 뇌, 귀 같은 온갖 기관에 병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휴먼디지즈 박물관에 기꺼이 함께 가준다. 나는 한 번 쑥 둘러보고 중간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책방에서 하지 못한 교정을 했고 아이는 한참이나 더 인체의 장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왕 시티에 온 김에 캥거루를 사러 패디스 마켓에 갔는데 하필이면 쉬는 날이다. 검색해 보고 더 싸다고 해서 왔는데 기념품은 하는 수 없이 멜버른 퀸 빅토리아마켓에서 사게 생겼다. 



문 닫은 패디스 마켓 앞에서 또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달링스퀘어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많아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아이는 또 자기소개서를 다듬었고 나는 교정을 더 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커다란 소파는 대부분 집 없이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낮 시간에 곤히 잠을 자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듯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쫓아내라는 민원에 벌써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노숙자들에게도 관대한 사람들과 도서관, 그 비결은 무엇일까. 지독한 개인주의일까 아니면 궁핍한 이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일까. 곤히 자는 이들도, 과제하는 학생들도, 쉬어가는 여행자들도 모두 저마다 고요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시드니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나 좀 어때 멋있지.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도 멋지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여유와 배려, 다양성이 어떠냐고. 



다시 버스를 타고 본다이 비치의 숙소로 돌아와 역시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 오늘은 벼르던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곧 만으로 열여덟 살이 되는 아이에게 작은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성인이 된 것처럼 펍에서 술을 한 잔 마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엄마아빠랑 가끔 마시긴 했다) 


안 될걸?

왜 안 돼?

생일 며칠 남았잖아?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닐걸? 정확히 계산할걸? 여기는 말레이시아가 아니잖아.

그래도 한 번 해 보자!


여권을 챙겨서 나갔다.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또 당연히 마실 수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으니 운이 좋다면 아이의 작은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겠지. 어쨌든 한 군데를 골라 들어갔고 마르가리따 두 잔을 시켰다. 사장인 듯 매니저인 듯 보이는 곱슬머리 아저씨가 말한다. 


저 친구의 나이를 확인할 수 있을까?


하필이면 바에서 너무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조금 기다렸다가 더 어려 보이는 알바생한테 주문할걸. 하지만 이미 늦었다. 주머니에서 얼른 여권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엄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안 되겠는데?

며칠 안 남았잖아. 그래도 안 될까?

놉. 그리고 18세 미만이라면 아홉 시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해.

오, 그렇구나. 시계를 보니 시간은 넉넉하다. 노 프라블럼. 그럼 마르가리따 한 잔, 그리고 아이스 티 한 잔 플리즈.


실망한 채 아이스티를 마시는 아이 옆에서 마르가리따를 홀짝이고 있는데, 이상타. 내 마르가리따는 분명 저렇게 넘칠 듯 찰랑이지 않았는데, 다른 손님들이 들고 다니는 잔은 넘칠 듯 말 듯 찰랑하다! 우씨, 왜 나만 마르가리따 조금 줘? 이것도 인종차별인가? 어쩌다 매 순간 인종차별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럴 필요 없는 순간들만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미성년자에게 술을 먹여보려다가 걸린(?) 부모로서 가서 따지기도 그래서 얼른 한 잔을 마시고 펍을 나섰다. 집에 오는 길에 보틀샵에 들러 보드카와 소다가 섞인 가벼운 캔 주류를 샀다. 그래, 엄마랑 집에서 편하게 먹자! 벌써부터 술을 자주 홀짝이게 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무슨 큰일이 나겠나. 술은 부모한테 배워야 한다는 게 우리 부부의 지론이기도 하니까. 알딸딸 기분이 좋아지면 둘 다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다. 평소의 수다가 도란도란이라면 함께 술을 한 잔 마신 후의 수다는 더 씩씩하고 왁자지껄하다. 웃음도 잦고 목소리도 크다. 품에 쏙 안겼던 아기가 어느새 다 커서 술친구가 되어주다니 감개무량하다. 물론 이 시기는 금방 지나가겠지. 집을 떠나면 친구들과 마실 테니까. 그러니 더 자주 누려야겠다. 고3 아이와 술을 더 자주 먹겠다고 다짐하는 엄마라니 참 이상도 하다. 그렇게 본다이의 뒤죽박죽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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