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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Oct 24. 2024

굿바이 젯스타, 굿바이 아고다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하늘이 쾌청하다. 하필 우리가 본다이를 떠나는 날 날씨가 가장 좋다. 우리는 또 잔뜩 껴입고 웅크린 채 공항으로 가는데 바다에는 여전히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어제 아이가 그랬지.  


“엄마, 저 아저씨 수영복, 내 팬티보다 더 작아.”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웻슈트를 입고 서핑 보드를 든 씩씩한 여인들이 내 앞을 지나간다. 추위는 아랑곳없이 생기 넘치는 그 모습을 보며 저게 머지않은 내 미래의 모습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서핑 강습 1회 차에 거푸 물을 먹다가 강습 시간도 다 마치지 못하고 포기한 전력이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조만간 아이가 독립을 하면 왠지 홀가분하게 이것저것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스무 해 동안 육아를 하며 나의 청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숨어 있는 것일 뿐이라며 스스로 세뇌하는 중이다. 그리고 지나가는 저 아가씨의 바닷물 머금은 웻슈트 등짝을 한 번 쓰다듬으면 왠지 나도 언젠가는 파도를 가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예전에 아들 낳겠다고 남의 속옷을 훔쳐 입던 우리 조상님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쓰다듬어보고 싶었다. 그 짜디짤 등짝을.


공항으로 가는 길은 편했다. 인간구글맵이자 나와 싱크가 가장 잘 맞는 여행 메이트 딸 덕분이다. 어려서부터 함께 여행을 하다 보니 서로의 취향도 잘 알고 그에 맞춰 한 번씩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제 짐도 알아서 잘 챙기는 똑순이 딸인 데다가 필요할 땐 길도 알아서 척척 안내한다. 가끔 내가 헤매면 도리어 잔소리를 해서 문제지. 그런 메이트와 헤어지고 나면 나에게는 (딸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맞춰 온) 남편이 있겠지만 아이는 또 어떤 이들을 만나 함께 여행을 하게 될까. 대학에서 사귄 친구일 수도, 어쩌면 커플링을 나눠 낀 남자 친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랑 어딜 가든 제 한 몸 지키면서 씩씩하게 다닐 수 있을 만큼은 잘 키워놓은 것 같다. 누가 되든 함께 진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좋은 사람이면 좋겠다. (나에게도 그녀와 여행할 몇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길 바라고)  


시드니에서 멜버른까지 우리를 실어줄 비행기는 젯스타 항공. 탑승구에 도착해 어디에 앉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젯스타 직원이 눈앞에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우리 가방을 저울에 올리고, 순식간에 아이패드를 클릭클릭 하더니, 순식간에 나에게 청구서를 들이민다. 여기까지 정말 10초도 안 걸린 것 같다. 나도 동남아시아에 살면서 저가 항공을 꽤나 이용해 봤지만 대부분 저울 앞에서 짐을 다시 쌀 시간이나 여유가 있기도 했고 혹은 몰랐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부탁하면 몇 킬로그램은 그냥 눈감아 주기도 했는데, 이렇게 속사포 같은 일처리는 처음이었다. 옷을 다 꺼내 입기, 주머니에 이것저것 쑤셔 넣기, 한 번만 봐달라고 부탁하기 등의 옵션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속담을 시드니 국제공항에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다니. 나는 어느새 그녀가 내민 아이패드에 고장 난 로봇처럼 엉거주춤 신용카드를 갖대 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75불이 날아갔다. 기내용 캐리어가 그렇게 무거울 일이었나. 두 개에 19킬로그램이 넘었으니 무겁긴 했다. 그래도 혹시 인종차별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그것도 아니다. 그녀의 저울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매의 눈으로 짐 검사를 마친 척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을 찾아냈다. 75불을 허공에 날리고 그제야 검색해 보니 젯스타가 원래 그렇다는 후기기 자자하다. 피할 수 있는 팁도 풍성하다. 예를 들면, 비행기를 놓치지만 않을 정도로 아주 늦게, 저울 팀이 다음 타깃으로 이미 이동해 버린 후에 탑승구에 도착하기 등이다. 주머니가 아주 많은 카고 바지는 기본이고.


아이는 비행기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무서워하는 편이라서 이륙과 착륙 때 내 손을 부서져라 잡는다. 나는 다른 부분에서는 걱정이 많은데 유독 ‘여행’ 관련 카테고리에서만은 지나치게 겁이 없는 편이다. 이 비행기, 혹은 기차나 배가 안전할지, 나를 따라오라는 저 사람을 믿어도 되는지, 이 길로 혼자 가면 위험하지 않을지 등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그래도 그동안 큰 일은 없었고, 큰일이 나기 전에 잘 파악하고 대처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젊었을 때와 아이가 더 자랐을 때의 세상은 분명 다를 것이고 아이는 어쩌면 나보다는 더 불안한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불안한 마음은 분명 우리를 보호해 주지만 이 넓은 세상에 뛰어들어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도전정신을 짓누를 정도로 아이가 세상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손을 꽉 쥐고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끝말잇기 할까?”

“갑자기?” 기가 막히다는 듯 대꾸하지만 자연스럽게 끝말잇기는 시작된다.


비행기

기차

차표

표범

범인

인사

사랑

랑?

아니, 잠깐만. 다른 걸로 바꿀게. 사과.  


우리 끝말잇기의 특징이 있다면 어려운 단어를 말한 사람이 금방 그 단어를 철회하고 다른 단어로 바꾼다는 것이다. 끝말잇기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비행기는 몇 번 덜컹거렸고 그녀는 단어를 떠올리는데 집중하는 척 무서운 마음을 애써 뒤로 밀어 넣고 있었을 것이다.


과장

장소

소리

리본

본다이!


오늘 아침에 우리가 떠나온 본다이. 우리의 유구한 끝말잇기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단어가 되겠다.


다행히 젯스타는 무사히 멜버른에 도착했고 새빨간 스카이 버스가 우리를 시내에 내려주었다. 비가 내렸는지 축축해진 바닥을 어스름이 뒤덮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드니와 다른 칼바람을 헤치며 한 손으로 짐을 끌고 한 손에 구글맵을 들고 예약해 놓은 숙소에 겨우 도착했다.


"안녕, 체크인 부탁해."


"어서 와. 여권을 보여줄래?"


“자, 여기.”


“고마워. 네 방은 트윈 룸이고 1층에 있어. 화장실은 복도 가운데에 있고.”


“뭐라고? 나는 트윈룸이 아니라 화장실 딸린 더블룸을 예약했는걸? 뭔가 실수가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한번 확인해 줄래?”


“맞는데? 우리 시스템에는 트윈룸으로 뜨는데.”


“아니야, 나는 더블룸을 예약했어.”


나는 아고다에서 온 예약 확정 메일을 보여주었다. 다른 정보는 한국어였지만 방 타입만큼은 분명 ‘Premium Double 프리미엄 더블’이라고 영어로 적혀 있었다.  


“미안해. 만약 더블룸을 예약했다면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해야 했어. 우리 시스템상으로 예약은 무조건 트윈룸으로 되거든. 게다가 우리한테 프리미엄 더블이라는 방은 없어.”


“뭐라고? 수십 번 아고다로 예약을 하면서 숙소 측에 전화를 해서 컴펌을 해야 했던 적은 없었어. 그럼 이 방 사진을 좀 볼래? 이 방은 있지? 나는 이 사진을 보고 이 방을 예약한 거야.”


“그 방이 있긴 한데 미안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어. 아고다에 전화해서 문의해야 할 것 같아. 우리 시스템 상으로는 트윈룸이야.”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를 안 받는데?”


“그럼 이메일을 보내봐.”


“그럼 아고다가 이메일에 답장을 할 때까지 여기서 이렇게 기다려?”


“미안한데 우리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아니면 차액을 내고 더블룸으로 업그레이드하던가.”


“내가 예약한 방이 그건데 왜 내가 돈을 더 내야 하는데?”


아무리 말해도 다시 돌아오는 대답은 아고다에 문의하라는 말 뿐이다. 참 어처구니없는 정책이다. 고객이 왕이 아니라 숙소가 왕이다. 나는 왕 대접을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예약한 방을 내어 달라고 한 것뿐인데, 이를 위해 아고다에 전화를 하고 메일을 보내 내가 그 방을 예약했다는 사실을 너네한테 증명하라고? 참 어처구니없었지만 거기서 더 열을 내고 싸우기엔 뭐랄까 너무 추워서 전의가 불타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그래서 업그레이드는 얼만데?”


“14달러.”


“하룻밤에?”


“아니, 이틀 밤에?”


“아, 그래?”



갑자기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그 정도면 쓸데없는 싸움을 포기할 만하겠다. 그럼 우선 돈을 더 내자, 그리고 아고다에 전화하거나 메일을 보내서 이 사실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고 반드시 차액을 받아내자고 한 1초 정도 생각하다가, 그냥 만오천 원어치 군것질을 참고 조용히 아고다를 손절하기로 마음먹었다.


키를 들고 ‘프리미엄 더블’이 있는 5층으로 올라갔다. 옥탑이다. 한여름 선선한 밤에 사람들이 모여 1층에서 사 온 드래프트 비어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당구를 치거나 석양을 감상하는 사진에 반해 예약했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초록 하나 없이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경이다. 한동안 아무도 찾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이는 옥탑의 501호 문을 열었다. 문은 또 어찌나 무거운지 75달러를 더 내고 가져온 19킬로그램의 무게와 맞먹는 듯했다. 방은 지금까지 묵었던 방 중 가장 작다. 침대 이외에는 앉을 곳이 없다. 작은 캐리어 두 개도 겨우 펼쳐놓았다. 하지만 성능 좋아 보이는 벽걸이 히터가 있다. 히터가 눈을 찡긋하며 말하는 것 같다. ‘웰컴 투 멜버른. 여긴 시드니보다 더 춥단다. 굿 럭 투 유 투.’ 춥고 배고프고 서러웠다.  


“나가자!“


“어딜?”


“퀸빅토리아 마켓. 수요일 밤에는 나이트 마켓이 열리거든!”




사진: UnsplashHendri Liday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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