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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Oct 03. 2024

전광판에 우리 얼굴이 떴다



시드니행 항공권을 끊고 숙소를 살펴보기도 전에 준비한 것이 바로 넷볼 경기 티켓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넷볼 시합 날짜를 확인하고 이를 고려해 비행기표를 확정한 것이다.


아이는 다니고 있는 국제학교의 넷볼 선수다. 학교에서 가장 높은 학년으로 어시스턴트 코치를 하고 있으며 지역 아마추어 넷볼팀에도 소속되어 훈련하고 있다.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것 같아 잠시 설명하자면 넷볼이란 농구를 모방해 만든 여성들을 위한 새로운 경기로 (요즘은 남성 넷볼팀도 있긴 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영연방 국가들의 대중적인 스포츠다.


그래서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시드니 올림픽 파크 스타디움. 아이가 시드니 여행 중 가장 기대한 날도 바로 오늘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팀과 선수들의 경기가 있는 날. 스타디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공식 굿즈 판매숍. 다 사고 싶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 옆에서 나는 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촌스럽기만 한 티셔츠 한 장이 8만 원 돈이라니. 하긴 팬들의 눈에는 그 촌스러움이 보이지 않겠지. 튀어나오려는 두 눈을 얼른 집어놓고 카드를 꺼내 시원하게 결제해 주었다.


스타디움 앞 잔디밭을 빙 둘러 푸드 트럭이 즐비하다. 땅덩이도 크고 사람들 체격도 커서 그런지 푸드 트럭도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주문을 받거나 조리하는 사람들을 보려면 고개를 45도 이상 꺾어 들어야 한다. 돈을 내거나 음식을 받을 때는 ‘저요’ 하듯이 손을 위로 치켜들어야 한다. 한낮의 일요일, 다소 누그러진 추위에 다들 소풍 나온 사람들처럼 설레는 표정이다.


잔디밭에서 잠시 해바라기를 하다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앞에서 두 번째 줄이라 코트에 나와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과 눈도 마주칠 수 있다. 방송국 카메라도 분주하고 금발의 리포터가 경쾌한 목소리로 경기 전 브리핑을 한다. 그러는 동안 비어 있던 옆 자리가 슬슬 채워진다.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연령대도 다양하고 얼굴에 멋진 그림을 그린 소녀들이 각종 피켓을 들고 동동거린다.


와아!!! 엄마, 저 사람이야! 내가 말했던 선수! 어, 저기도!


아이가 동경하는 선수들이 바로 눈앞에 있다. 훤칠한 키에 포니테일로 바짝 묶은 머리. 길고 탄탄한 팔과 다리가 아름답다. 넷볼은 한 팀당 7명의 선수들이 15분씩 4쿼터를 뛴다. 그물에 공을 넣는 것은 똑같지만 백보드가 없고 애초에 여성들을 위해 농구보다 더 안전하게 만든 스포츠라 몸싸움도 없는 편이다. 드리블은 허용되지 않고 오직 패스로만 공을 전진시켜 슛으로 연결해야 한다.


탄탄한 선수들이 정확하게 공을 주고받는데 그 속도가 대단하다. 공 자체의 속도도, 공이 상대편 골대를 향해 전진하는 속도도 말이다. 공이 선수들 손에 착착 달라붙는 게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 같다.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이쪽 코트에서 저쪽 코트로, 다시 골대로 로켓처럼 이동하는 공을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무엇이든 어느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어찌나 멋있는지.


쿼터와 쿼터 사이 쉬는 시간이 되면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커다란 전광판에 관중들의 모습을 띄워주었다. 무작위로 아무나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매번 테마가 있었는데 그중 한 번은 갓난아기들이 주인공이었다. 아직 말도 못 할 아기들이 잠을 자고 있거나 상황 파악 못 하는 표정으로 엄마아빠 품에 안긴 모습이 커다란 전광판에 뜬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귀여웠던 아기는 눈을 꼭 감고 라이온킹의 심바처럼 들어 올려진 아기였다. 얼마나 귀여웠는지! 화려한 페이스 페인팅의 주인공들도 한 차례 전광판을 가득 채웠고 멋진 피켓이나 특별한 응원복을 입은 무리도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양 옆 어린이들의 발랄한 응원도 카메라맨의 눈에 띄었는데 덕분에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다. 


와, 카메라 온다. 우리 얼굴도 뜨겠다! 저기, 저기! 오, 시드니까지 와서 우리 출세했네!


아이가 아니었다면 시드니에 와서 이곳 올림픽 파크 스타디움에 올 일도, 전광판에 얼굴이 뜰 일도 없었겠지. 역시 육아는 나의 세상을 넓혀준다.  


각종 추임새를 넣으며 경기를 보던 아이가 말한다. 종목과 상관없이 모든 스포츠 관중의 가장 기본적인 반응 중 하나 되시겠다.


아니, 그걸 못 막냐!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속으로 약간 기가 차긴 했다. 아무리 자신감이 넘친다 해도 저들은 프로가 아닌가. 내 딸이지만 자신감이 좀 과하지 싶다. 물론 내가 자신감 넘치게 키우려고 노력했지만 이 정도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사춘기도 지난 마당에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착각은 진작 졸업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쩌면 그녀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직 우물 안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보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가면 각종 좌절종합세트를 원하지 않아도 실컷 받겠지. 그러니 그전까지는 그렇게 충만한 자신감도 괜찮지 싶기도 하고. 또 생각해보면 나는 살면서 무엇에든 그토록 자신감이 넘쳤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드니 지금 다소 과한 것 같은 아이의 자신감이 괜히 더 소중해진다. 


사회가 발전하고 안정되면서 특별한 좌절 없이 무탈하게 자라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럴수록 의외의 변수에 쉽게 흔들릴 것이다. 지금 넘치는 그 자신감이 그저 아름다운 동화 속 자신감 같아 미심쩍은 마음이 살짝 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딸이 그 씩씩한 마음을 오래 지켰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주변의 함성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며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덩달아 소리친다. 와!!!


그렇게 한바탕 소리치고 났더니 기분이 좋다. 그래, 어쨌든 살면서 스포츠는 꼭 필요하다. 건강한 몸은 물론 건강한 마음을 위해서도. 잘 배워 놓은 스포츠 하나로 스트레스도 풀고 자신도 돌보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법도 꾸준히 연마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아이가 어디서 무얼 하며 살든 넷볼이, 넷볼을 못하게 된다면 또 다른 어떤 운동이, 힘들 때 단단히 붙들 수 있는 튼튼한 동아줄이 되었으면 좋겠다. 


경기가 끝나고 인파에 뒤섞여 스타디움을 빠져나오며 여전히 상기되어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서 기대했던 대로 오늘이 가장 즐거운 날이었어?

응! 추운 것만 빼면!

그래, 너무 춥다!


밤이 되니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다. 게다가 오늘 하필 옷을 가볍게 입고 나왔더니 추워서 이가 덜덜 부딪힌다. 결국 저녁을 먹고 또 옷을 사러 갔다. 멜버른에 가면 더 추워질 테니 확실히 겨울옷이 더 필요하다. 두툼한 점퍼를 사서 한 명이 입고 (아마 넷볼 선수 그녀가 되겠지) 나머지 한 명은 남은 옷을 전부 껴입으면 얼추 될 것 같다. (그게 내가 되겠지) 시드니에 오기 전에는 몰랐다. 내가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옷들을 전부 껴입으며 매일 얼마나 추레하기 다니게 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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