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여행 5일 차. 해야 할 숙제가 있는 아이를 놔두고 혼자 집을 나섰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마침 숙소 근처에 있는 우체국.
여행 기념품으로 가장 만만한 것이 바로 엽서다. 책상 앞이나 벽에 가볍게 붙여 놓을 수도 있고 책갈피로도 쓸 수 있으며 가져갈 때도 무겁지 않고 이사 다닐 때도 편하다. 여행지에서 친구에게 엽서를 보내는 낭만은 덤.
그래서 며칠 전 서큘러 키 앞 편의점에서 시드니 엽서를 몇 장 샀고 산 김에 한국에 있는 베프에게 몇 자 적었다.
안녕, 친구야. 나는 지금 시드니야. … 이십 년 전에 네가 시드니로 보내준 커다란 소포가 생각난다. 내가 좋아했던 맛동산이 가득 들어 있었지. 네 편지가 빼곡히 담겨 있던 빵모양 수첩도 생각난다. … 다시 찾은 시드니에서 옛 생각이 나 한 자 띄운다. … 네가 내 친구여서 너무 좋아. …
대충 이런 식으로 썼던 것 같다. 보내버리고 나니 생각이 안 나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놓을 걸. 마지막에 사랑한다고 했었나 고맙다고 했었나. 둘 다 없이 그냥 쿨한 척 마무리했나. 그렇게 2달러를 내고 한국으로 엽서를 부친 다음 우체국에서 나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이 도시에서 나는 여행자 같지 않다. 오래전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일까. 여행이 아니라 이십 년 전 일상으로 갑자기 뚝 떨어진 느낌이다. 옆에 아이도 없으니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카메라도 잘 꺼내지 않는다. 오페라하우스를 본다고 크게 감동하지도 않는다. 그저 파란 하늘을 한 번씩 올려다보며 씩씩하게 걸을 뿐이다. 이십 년 전의 내가 주름진 거죽 안에서 튀어나와 씩씩하게 걷는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내가 살던 집 앞을 걷고, 찬바람에 종종거리며 출퇴근하던 길을 걷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새롭게 변한 길을 걷는다. 피부는 보송보송했지만 삶은 아직 납작하던 오동통 애송이가 어느새 산전수전 다 겪고 무릎 연골도 닳아가고 여기저기 흰머리가 삐져나온 여인이 되어 걷는다. 그 추억을 걷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시드니 여행의 목적은 달성된 것 같다. 나는 결국 나의 청춘을 다시 걷기 위해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걷다 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늘 다니던 피트 스트리트 근처인데 자주 와보지는 않았던 벨모어 공원이다. 벤치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일행이 없으니 자유롭게 만발하는 생각을 조금 기록해 놓고 싶어서. 그런데 한 오 분 앉아 있었을까. 하늘에서 갑자기 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비가 오나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은 화창하다. 그럼 나무 위에 앉은 새똥? 혹은 오줌? 그럴만한 나뭇가지도 없이 가로등 하나만 딸랑 서 있다. 그렇다면 새가 날아가면서 싼 오줌인가. 다른 벤치를 찾으려다가 일어나 걸으라는 신호로 여기고 계속 걷기로 한다.
어느새 패디스 마켓. 싱싱한 게 먹고 싶어 귤을 한 봉지 샀다. 그리고 마켓 앞 벤치에 앉아 야금야금 까먹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여자 아이들은 왜 그렇게 배를 내놓고 다니는 걸까. 우리 집에 있는 애도 딱 그런데. 그런 생각들을 하며 맛있는 귤을 야금야금. 그러다 사람 구경이 지겨워져 시티에 있는 코울스에 가서 고기를 샀다. 호주는 소고기지. 집에 가서 맛있게 구워 먹어야지. 다시 벨모어 공원을 지나 빨간 불이 켜 있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옆에서 누가 말을 건다.
안녕. 넌 어디서 왔어?
나? 한국에서 왔어.
그러자 그는 자기가 아는 한국어를 모조리 쏟아내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괜찮아요. 잘 지내요. 예뻐요.
이런 갑작스러운 한국말 자랑대회에는 딱히 반응하고 싶지 않다. 그저 어색하게 웃어줄 뿐.
하하하.
한국어 자랑 대회가 끝나고 그가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어디서 왔을 것 같아?
글쎄. 내가 그런 걸 잘 못 맞혀서 말이야.
그래도 두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는 눈치길래 대충 몇 나라의 이름을 말해보았다.
타이완? 베트남? 일본?
그러자 갑자기 플레이 버튼이라도 눌려진 듯 노래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그의 긴 흥얼거림이 시작된다.
오하요? 오하이오? 어쩌고 저쩌고. 알아듣기도 힘든 말들을 주절주절, 흥얼흥얼.
뭐래니. 일본에서 왔다고? 아니, 미국? 오하이오? 아, 나랑 대화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떠들고 싶은 거구만. 떠들 대상으로 내가 걸린 것뿐이고.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고 우리는 나란히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노래를 멈추고 본론을 꺼냈다.
나는 싱글인데 너는 패밀리가 있니?
(그럼 그렇지) 응, 나는 패밀리가 있어. 지금 날 기다리는 가족한테 가는 길이야.
다행히 포기는 빠르다. 실망의 눈빛을 재빨리 감춘 그가 어처구니없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너 김정은 알아?
(기가 막혀서) 지금 나한테 김정은을 아냐고 묻는 거야? 사우스 코리아에서 온 나에게?
그랬더니 그의 대답이 가관이다.
우리 삼촌이야.
(더욱 기가 막혀 혀를 차며)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무척이지 재미라고는 없는 농담이구나.
마침 길 건너 트레인 역 앞에 도착했고 그는 떨떠름한 미소로 대화를 마무리하며 트레인 역 안으로 총총 사라졌다.
이건 뭐 플러팅 치고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잖아? 솔직히 이 말은 안 하고 싶었는데, 흰머리도 나는 마당에 이런 걸 숨길 이유도 없으니 말해보자면, 김정은의 조카라던 그는 멋진 청년은 분명 아니었고, 하다못해 중후한 젠틀맨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세상에 나보다 흰머리가 더 많이 난 할아버지였다. 그러고 보니 김정은과 나이 계산도 안 맞잖아!
쳇, 날 뭘로 보고! 괜히 죄 없는 내 머리카락만 헝클어트리며 삐져나온 흰머리를 감춘다. 그래도 애 없이 나오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먼. 조금 더 오래 걸었다면 중후한 젠틀맨 정도는 당첨되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의 패밀리가 기다리고 있는 숙소로 씩씩하게 걸어간다. 지글지글 소고기나 구워 먹어야지. 당연히 레드 와인도 한 잔 쭉!
덧. 한국으로 보낸 엽서는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디서 길을 잃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