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카페에서 십이년 전 그를 만났다

by 아리



카페 안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서너 명이 각종 샐러드와 알록달록 건강 주스를 앞에 놓고 신문을 읽거나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두컴컴한 구석의 넓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직원이 갖다 준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넓은 테이블의 다른 쪽 끝에 A가 앉아 있었다. 갑자기 삐져나오는 비명을 겨우 틀어막으며 눈만 커다랗게 떴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웬일이야? 여기서 뭐해? 놀러 온 거야? 언제 왔어? 어디 묵어?’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질문을 던져댔다. 그는 늘 그랬듯, 장난스러우면서도 인자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먼저 시켜. 나도 배고파.’

12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처음 하는 말 치곤 너무 평범하고 소박하지 않은가.

그는 배가 고프다며 온갖 햄이 듬뿍 든 샌드위치와 콜라를 주문했다. 나는 따뜻한 카페라테를 시켰다.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갔고 우리는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테이블이 작았다면 벌써 손을 덥석 잡았을 것이다.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금발 머리칼은 그대로였고 눈가에 주름이 약간 생겼지만 그때 가끔 푸석하던 피부는 살이 붙어 탱탱해 보였다. 테이블로 가려진 배는 안 보였지만 목덜미 부분만 봐도 약간 살이 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적당한 체격의 평범한 배우였다. 누구나 기억할 만한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던 게 그의 한계였다. 약간의 애정을 갖고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그래도 12년의 세월에 비하면 나잇살이 그렇게 많이 붙진 않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때와 비슷했다. 내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기록했던 그때 이후로 빼고 찌기를 반복하다 다시 그때와 비슷한 수준이 되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가 나를 알아본 건지도 몰랐다. 내가 날씬 미녀가 되어 있었다면 이런 기적적인 우연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밉기만 하던 뱃살이 갑자기 사랑스러워졌다.


그는 며칠 전 우붓에 왔고 사얀 근처의 한 리조트에 머물다가 멘장안으로 간다고 했다. 발리에 자주 다녔는지 남쪽 지역은 벌써 지겨워 안 가본 북쪽으로 올라간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세 살 난 아들과 아내와 함께 왔는데 아들이 낮잠을 잘 시간이라 혼자 얼른 시내 구경을 나왔다고 했다. 그러다 마트 계산대에서 날 봤고, 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고 생각하다가, 내가 오토바이 타는 모습을 보고 딱 맞다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날 쫓아 여기까지 왔단다.


‘어떻게 지냈어? 아직도 연기해?’


‘아니, 이젠 안 해. 지금은 그냥 직장인이야. 리더십 강연 같은 걸 하러 다녀.’

와, 그래? 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럭저럭, 큰 유명세 없이 평범하게 사는 그를 보며 같은 배우의 꿈을 키웠던 나는 지금은 리더십 강연을 한다는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와이프는 어떤 사람이야? 아들 이름은? 등과 같은 질문은 삼가고 싶었다. 너무 현실적인 질문들이었다. 그는 내가 젊음에 취해 한참 원대한 꿈을 꾸던 시절 만난 친구였고, 그 역시 나보다 나이는 조금 많았지만, 그리고 꿈도 조금 이루었지만, 여전히 더 큰 꿈을 향해 차근차근 걸으며 내 길을 밝혀주었던 친구였다. 수많은 밤, 우리는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며 뒷마당에서 밀크티를 함께 마셨다. 젊음이 넘쳤던 꿈같은 시절이었다. 예고 없이 떠올라버린 아련한 추억을 충분히 음미하기 전에 지금 그의 현실에 대해, 지금 나의 현실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다가는 그 아름다운 추억을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이 추억을 전부 잡아 먹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좋아 보이네.’ 그가 말했다.

‘고마워.’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마침 커피가 나왔다.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잔을 들어 올렸다. 부끄러운 감정이었는지, 추억에 빠져들었는지, 입술에 닿는 커피의 느낌만 빼면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우리는 간간이 단답형의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는 아직도 시드니에 사는지, 나는 어쩌다 우붓에 살게 되었는지. 하지만 최대한 각자 현실과 무관한 질문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도 지금 내 삶에 대해, 아이에 대해, 하는 일에 대해 시시콜콜 캐묻지 않았다. 그도 12년 전의 추억에 흠뻑 빠져 있어 보였다. 간간이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카페 안의 의미 없는 사물들을 한참씩 바라보곤 했다. 그도 아직 그 집에, 그 거리에 있었다. 갑자기 피로해졌다. 추억은 가끔 그렇게 무겁다. 그 무게에 어깨가 뻐근해졌다. 문득, 더 앉아 있다가는 12년 전 그의 모습을 더이상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적당히 살이 붙은 지금의 모습만 자꾸 생각날까 두려웠다.


잔과 접시를 비운 우리는 나란히 일어섰다. 카페 밖으로 나와 줄줄이 늘어선 오토바이를 향해 걸었다. 그의 것과 내 것이 나란히 서 있었다. 성긴 나무 그늘로 비집고 들어간 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때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나는 담배를 피웠다. 지금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그는 담배를 피운다. 내가 말없이 손을 내밀자 그가 내게 한 가치를 건넸다. 이건 담배가 아니라 추억이야, 라고 생각하며 나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리는 그렇게 성긴 나무 그늘 아래서 겨우 햇빛을 피하며, 조금씩은 땀도 흘리며 담배를 피웠다. 타들어 가는 담배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또 만나자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우연이 아니라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과 함께 시끌벅적 만나기는 더더욱 싫었고 그도 그건 원치 않아 보였다. 12년 만에 만난 우리는, 어쩌면 각자가 가진 12년 전의 추억을 만난 것뿐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아쉬운 듯 담배를 비벼 끄고 잠깐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따뜻한 포옹을 나누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움직이며 햇빛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오토바이에 올라타 선글라스 너머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여전히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그도 손을 흔들었다.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예전 그의 모습이 더 선명해졌다.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그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손을 흔드는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동을 걸고 고개를 돌렸다.


부아아앙. 오토바이가 출발했다. 바람이 따가워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다.

나는 아직도 그 카페에 앉아 있었고, 반대편 끝 자리는, 그저 어두웠다.

나는 느리게 눈을 껌뻑이며, 어두운 카페에서 홀로 빛나는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았다.

눈물이 나려고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