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의 기대 연봉은 육천과 칠천 사이(물론 세전이다). 제조도 아닌 유통업이고 문과를 졸업한 누구에게는 큰돈이다. 야근도 많고 주말을 챙기기 힘든 스케줄 근무에다 쉬는 날 없이 전화가 걸려오지만 매달 25일이면 430만 원가량의 큰돈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넣어주는 곳이 어디 흔할까. 카카오 택시에는 회사 카드가 등록되어있고, 점심/저녁 식사 제공에 유급휴일도 많고 노동절, 창립기념일 등 꼬박꼬박 쉬는 날도 챙겨주고 위로휴가, 병가에 각종 지원금이며 제휴 할인까지 재계 순위 2X위의 대기업이 주는 것들은 엄청나다.
퇴사를 하면서 가장 불안했던 것은 미래가 아니라 월급이다. 16년까지만 해도 없던 돈이고 품 팔아 큰돈으로 살아온 시간은 고작 5년이 안되는데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서울에서 나는 살 수 있을까. 월세, 공과금, 넷플릭스, 유튜브 프리미엄, 핸드폰 요금에 식비, 경조사비, 술값 등등 줄일 수 있되 줄일 수 없는 것들에 모두 가격표가 붙어 있다. 회사에 있을 때는 당일치기 제주여행을 다녀오거나 예쁜 가디건을 사고도 돈이 꽤 남았지만 유직 백수로 살아가는 아직은 통장 잔고를 살펴봐야 할 일이 많다.
회사를 나오며 이직 따위는 없다고 다짐했고, 어제 단기계약 근로계약서를 새로 썼다. 운이 좋아 일하던 호텔 플라워팀에 5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단기계약직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원래 있던 남자 대리님이 퇴사하고 여자 대리님이 오셨고, 다른 사원님도 4월에 퇴사하시면서 빈자리를 내가 잠깐 채우게 된 것이다. 5월은 보통 웨딩이 가장 바쁜 달이지만 다른 행사들과 겹치는 바람에 마침 결혼식 숫자가 많지 않아서 조금 여유롭게 일을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는 일의 기본은 달라지지 않지만 이제 혼자 맡아서 해야 하는 공간과 장식들이 늘어났고, 일주일에 5일을 출근하는 직장인으로 돌아왔다. 9-6가 지켜지고 매번 새로움을 기획해야 하며 새벽까지 숫자와 싸우지 않아도 되지만 월급이 300만 원쯤 줄었다.
월급이 300만 원 줄면서 일하면서 입을 옷값, 매일 넘치게 마시던 커피와 퇴근 후 술값이 줄었지만 동시에 문화생활비와 저축, 책과 작은 것들에 쓰던 사치 비용들도 함께 줄었다. 그 와중에 여행은 다니고 맛난 밥도 먹지만 예전처럼 회사가 갚아 주겠지라는 무신경함은 버려뒀다. 외교관, 경찰관, 교사에 임용되고 로스쿨을 졸업해 검사나 변호사가 되고, 약대에 편입하고 군의관을 제대하는 친구들을 보며 부럽고 멋있다고 시샘하고 싶다. 그러면서, 그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시샘하면서 아직 데구르르 굴러가고 있는 내 주사위를 함께 지켜보자고 유혹하고 싶다. 퇴사를 하며 팀장님에게 꿈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러 간다고 말했으니 나는 줄어든 월급 300만 원만큼 매달 무언가를 더 생산해 볼 참이다.(문득 브런치 글 한편에 오만 원쯤으로 쳐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어버이날 꽃을 주문하고 싶다는 친구의 호의를 거절했는데, 이달의 할당량을 무엇으로 채울까 하는 고민이 든다.
4월은 친구 프로포즈 꽃다발을 만들었고, 세 곳의 진로특강을 다녀왔다. 자전거를 타고 인천에 다녀왔고 남한산성 성곽길을 걸었으며 8편의 글을 브런치에 올렸다. 값으로 따져 100만 원쯤이라 했을 때 지난달은 200만 원 적자를 본 셈인데, 앞으로 한동안은 쿠팡식 운영법으로 간다고 여겨야겠다. 퇴사를 할 때 나중에 네가 하는 일에는 투자할 수 있겠다는 응원을 해 주신 지원팀의 차장님을 생각하며 나를 다독인다. (이 글을 읽겠지만) 경찰간부 시험에 합격해 경찰대학에서 교육 중인 그대도 한동안 월급이 적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다시 소고기를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19년 기준 1인 가구의 연평균 소득은 2,162만 원, 월 180만 원이다. 월평균 지출은 132만 원이고 70만 원가량이 주거와 식음료 비용이다. 작년 기사 중 직장인 MZ세대의 월평균 소득이 350만 원이라는 조사가 있으니 통계청과 기사들을 보고 나를 돌아보니 꽤나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종 꿈을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신데, 여전히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불법적이지 않고 멋있고 정당하며 그럴듯하고 재미있게라는 요상한 수식어가 붙긴 하지만 나와 내 일들에 대한 가치는 비싼 돈으로 표현되기를 바란다. 비싼 것들 만이 가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들은 비싸야 한다고 주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