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iel Apr 13. 2019

불법 촬영물, 알아서 지운다고요?

지난 수요일 밤 불쾌한 일이 있었다. 집으로 가는 골목 초입에 여자 4, 5명쯤이 모여있었고 그 곁을 지나던 남성이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사진 촬영을 했다. 찰칵! 무슨 일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무리에 있던 여자 한 분이 남자분을 뒤쫓아왔다. '저기요, 지금 불법 촬영하셨죠?' 

    여성분은 정중하고 단호하게 물었다. 기가 막힌 건 남자의 반응이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닌데요?' 라며 대꾸했다. 이상하게도 그 말투에서 난 남자가 불법 촬영을 했다는 걸 90%쯤 확신했다. 피로가 몰려와서 얼른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발걸음을 늦췄다. 여성분은 계속 촬영한 거 아니냐며, 다 봤다며 물었고 남자는 귀찮은 듯 아니라고 부정하다가 여성분이 지금 당장 지워달라는 요구에 '아, 알아서 지울게요~'라며 퉁명스럽고 뻔뻔한 태도로 제 갈길을 갔다. (문득 바라건대 그 갈길이 저승길이었으면...)

    불쾌한 감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저 여성분을 돕고 싶었다. 당신 찍은 거 다 봤다고 말을 보태볼까 혹은 찰칵 소리가 나게 '불법 촬영을 한 남성'을 불법 촬영해줄까. 1,2분 남짓한 시간 동안 고민에 휩싸였다가 이게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내 집이 코 앞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내가 해코지를 당하면 어떡하지?' 솔직한 심정으로 그자와 실랑이하는 건 무섭지 않았으나 후일이 무서웠다. 동시에 이런 고민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는 게 굴욕스러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남자를 노려보고 어디로 가는지 뒤따라가는 일밖에 없었다. '내가 불법 촬영을 당한 게 아니라 다행이야, 우리 건물에 사는 게 아니라 다행이야.' 같은 비겁하지만 가볍지 않은 안도감을 얻으며. 

    우연하게도 다음날 회사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들었다. 역겹지만 낯설지 않은 예시들을 들으며 헛웃음을 치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동료가 저런 사람들은 혼나야 된다고 속삭였다. 나는 어제 봤던 그 남자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저는... 저 사람들 혼쭐이 아니라 정말로 큰 병 걸렸으면 좋겠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