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권리 옹호>를 읽고
1784년 11월, <월간 베를린>은 엠마누엘 칸트에게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기고글을 통해 칸트는 계몽이란 미성숙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다른 사람이 이끌거나 보조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성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는 상태, 미성숙. 스스로의 지성을 사용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이 철학자에게, 18세기는 낙관적으로 보였으리라.
그로부터 145년이 지난 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책 <자기만의 방>을 출간한다. 노인에게 책을 읽어주고 아이들에게 철자법을 가르치는 노동을 통해 푼돈을 벌던 20세기의 여성은, 여성이 위대한 문학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녀는 책을 통해 칸트와 동일 시기를 살았던 작가 '제인 오스틴'을 소환한다. 제인 오스틴은 늘 가사를 하던 틈틈이, 혹은 이른 오전이나 밤 시간에 소설을 썼다. 자기만의 방이 없던 그는 늘 거실에서 작품을 완성했는데, 무례한 손님이 글을 들춰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을 해야만 했던 서로 다른 두 자매를 다룬 소설 <이성과 감성>은 그렇게 1795년에 쓰였다.
1792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를 통해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칸트를 위시한 남성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는, 바로 그 계몽에서 여성이 배제되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여성에게 가족과 결혼만이 삶의 전부인 것마냥 여겨선 안된다고, 가족의 이익을 최우선 하여 노예의 상태로 머물러선 안된다고 말한다. 외모와 매력만 개발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고 유도되며, 궁극적으로는 유아와 비슷한 미성숙 상태에 내몰린다고 논변한다. 성숙한 인격체가 되지 못한 여성은, 심지어 그들이 원하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인 제대로 자녀를 훈육할 가능성도 없어질 것이라 지적한다.
200년이 훌쩍 지난 2019년,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자기만의 방을 구축하였을까. 많은 경제지표는 여전히 여성이 남성보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불리함을 보여준다. 울프에게 21세기는, 주디스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펼칠 수 있는 시대일까. (버지니아 울프는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에게 가상의 누이 '주디스'가 있다는 가정 하에 <자기만의 방>의 한 챕터를 꾸려나간다.)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구사하는 유혹을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속성으로 여기며, 또한 도처에 그를 경멸하고 억압할 구실로 삼는 문화는 얼마나 만연한가. 여성이 누군가의 누군가(Someone's someone)이 아닌 누군가(Someone)로 동등하게 인식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길이 남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