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 너마저> 정규앨범 3집을 듣고
우연한 기회에 아주대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의 '소통에 관한 강연'을 듣다 무릎을 친 경험이 있다. 그는 성격도 IQ처럼 유전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유전적 형질, 즉 기질은 지역/국가별 경향성이 있는데 유독 한국인에게 자주 발현되는 감정 중 하나가 '빈정 상함'이라고 한다. 우리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타인이 긍정적인 메시지를 건넨다 할지라도 역으로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저 긍정적일 뿐 정확하지 않은 위로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런 부정확한 언어에 오히려 감정이 다치거나 예민하게 구는 것. 우리는 이를 가리켜 '빈정이 상한다'고 말한다. 낙천성이 기질적으로 높은 몇몇 국가에서는 이러한 감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교수는 덧붙였다.
정작 힘겨운 날에 우린 / 전혀 상관없는 얘기만을 하지 / 정말 하고 싶었던 말도 / 난 할 수 없지만 / 사랑한다는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 - <사랑한다는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 2집 졸업, 2010>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를 떠올렸다. 내가 그들의 노래를 좋아하던 어렴풋한 이유를 보다 명확하게 설명받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20대, 대학생 시절. 내게 <브로콜리 너마저>의 1집과 2집은 어떤 의미였을까. 보컬도, 연주도, 심지어 정서마저도 아마추어틱함으로 가득했던 이 밴드를 내가 사랑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김경일 교수의 언어를 빌려보자면, 그들은 타인의 '빈정상함'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쓰는 20대의 모습을 노래에 담았기 때문이리라. 서로 아프다는 것을 알지만, 아픔을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 소심한 청년들. 감히 위로의 손길을 함부로 내밀지 않고, 고양이마냥 관계의 문지방 앞에서 고민하는 청년들. 우리의 20대는, 청춘은 그러한 모습이었다.
나의 말들은 자꾸 줄거나 / 또다시 늘어나 마음속에서만 / 어떤 경우라도 넌 알지 못하는 / 진짜 마음이 닿을 수가 있게 / 꼭 맞는 만큼만 말하고 싶어 (중략)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놔 거짓말처럼 / 사실 아닌 말로 속이려고 해도 / 넌 알지 못하는 그런 건가 봐 / 생각이 있다면 / 좀 말 같은 말을 들어보고 싶어 -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2집 졸업, 2010>
브로콜리 너마저가 묘사하는 관계에서 '빈정상함'은 건드려선 안될 성역처럼 보인다. 타인의 오지랖에 쉽게 피로해지고, 무심한 오해에 질려버린 우리는 차라리 적극적으로 주저한다. 반대로 섣불리 접근하는 제삼자를 향해, 아주 조금 빈정댄다. 재치를 담아 아주 조금 비꼬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아닐 때는, 자조를 섞어 작은 목소리로 절규도 한다. 내가 회상하는 20대의 브로콜리 너마저는 그러했고, 그들의 피로도와 주저함에 공감하던 20대의 우리는 그들에게 환호했다. 그들의 노래마냥, 소심하고 조그맣게.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 짝짓기에 몰두했지 /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 서글픈 작별의 인사를 나누네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 <졸업, 2집 졸업, 2010>
00년대 말, 청춘이었던 우리들에게 그들의 부끄러움은 공감이 되었다. 서투른 관계에서 오는 머뭇거림, 멈칫거림, 이불 킥과 무한한 자기반성. 그럼에도 타인에게 더듬이를 내밀어 보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매번 하는 실수에 자주 하는 그들의 청춘은 우리들에겐 보편적이었다.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하자며, 브로콜리 너마저와 작별한 지 9년이 지났다. 이따금 나왔던 싱글들로는 팬들의 갈증은 해갈되기 어려웠다. 열화된 자기 복제가 계속된다는 비아냥이 스멀스멀 올라올 즈음, 정규 앨범 3집이 나왔다. 이렇게 긴 작별일 줄 미처 몰랐기에, 오랜만의 재회한 그들의 노래는 어색했다. 노래를 듣는 나도, 연주하는 그들도 어느새 30살이 훌쩍 넘어 버렸다. 과거 내가 사랑하던 청춘들은, 사회 초년생을 거쳐 준-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닌 걸 아니라고 하는 데까지 / 너무 많은 시간을 버려야 했던 / 날을 버티고 나서 찾아온 지금이 / 어쩌면 정말 어른이 되는 순간 / 서러운 날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해도 - <서른, 3집 속물들, 2019>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 높은 확률로 / 서로 실망하게 될 일만 남은 셈이죠 / 굳이 부끄러운 일기장을 펼쳐 / 솔직해질 필요는 없죠 굳이 -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3집 속물들, 2019>
그래 우리는 속물들 / 어쩔 수 없는 겁쟁이들 / 언제나 도망치고 있지만 / 꽤 비싼 연극은 언제나 빈자리가 없고 / 어쩔 수 없는 일도 너무 많다네 / 누굴 바보로 아는지 / 뻔하게 속이 다 보이는 말 / 괜찮아 많이 겪었으니까 - <속물들, 3집 속물들, 2019>
그들도 우리도 타인에게 주저하며 다가가는 것에 지쳤나 보다. 비처럼 쏟아지는 간섭과 오지랖에 흠뻑 젖었을지도 모른다. 나름 매력적이던 재치 있는 빈정댐이나 비꼼도, 이제는 살짝 날카로워지고 시니컬해졌다. 조심스럽지만 계속해서 남에게 던지던 시선은, 어느새 나 자신에게로만 향해 스스로를 위로하기에 바빠졌다.
하루 종일 신보를 듣고 또 듣는다. 여전히 서투르지만 적당히 속물스러워진 30대. 사회생활로 인해 이미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한 우리의 모습과 신보는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이 과거의 우리와는 달랐기에, 지금의 우리에게 매우 보편적인 앨범이라 슬프면서도 반갑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