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은 무척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먼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각본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촬영이나 연기, 편집처럼 영화를 이루는 다른 요소들도 모두 빈틈없이 조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 하나의 경지에 도달한 듯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영화에 반대합니다.
(아래에는 <기생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보며, 저는 영화가 품고 있는 지독한 냉소주의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기생충>의 결말은 완벽하게 닫혀 있습니다 (제가 참관했던 GV에서 감독님이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떠올려봅니다. 반지하 창문 앞에 매달린 양말에서 시작해 아래로 하강하는 카메라가 기우의 얼굴에서 멈추는 컷의 구조는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더구나 마지막 컷의 바로 앞에 힘없이 매달려있던 기우의 망상을 떠올리면 의도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기생충>은 하강으로 시작해 상승했다가, 끝내는 다시 하강하기 위한 영화입니다. 이를 악물고서 처음과 끝을 동일한 위치에 놓고 매듭을 묶어버린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감독님이 인물에 대해 가진 연민의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택의 가족과 문광의 가족이 서로 물고 밟고 치받는 귀결이 왜 그토록 당연하게 그려져야 했나요. 왜 기택은 스스로의 존엄을 유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야 했나요. 최소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한번쯤은 주셨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단 한번, 화해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송이의 케익이 준비되기 직전 충숙과 기정이 나눈 대화 말입니다. 본인들의 안위를 위해서였더라도, 최소한 그들은 지하실에 갇혀 배가 고플 문광과 그녀의 남편을 위해 고기 한 덩이를 더 집어들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기회는 그순간 부엌으로 찾아온 연교에 의해 날아가고 맙니다.
저는 감독님께서 눈물을 머금고 그 장면을 쓰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편이 더 비극적이니까, 그렇게 만들고 싶으셨던 거겠지요. 영화의 초반부에 기택이 식탁 위의 곱등이를 튕겨내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영화를 볼 때 그 장면에서의 기택은, '아줌마는 쌔고 쌨으니까'라고 무심하게 말하던 동익을, 나아가 각본 안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감독님의 태도를 닮아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게 다 제가 나이브한 탓일 겁니다. 애초에 이 사회에서 약자들은 서로의 자리를 뺏으면서 순환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선해야 한다는 건 명백한 편견이고, 그들간의 연대라는 건 배부른 사치에 불과한 것일 테니까요. 다만 제 불손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된다면, 바뀌지 않을 현실을 지적하려 하셨다기엔 처음부터 인물보다는 사건과 설정이 먼저였던 건 아닌가요. 애초에 연대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밀어넣고서, 모두 다 광대로 만든 뒤 얘네가 어디까지 가나- 하며 관음하고 싶으셨던 건 아닌가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가난을 몸에 걸친 채 종반부의 파국을 예비하는 장기말로밖에 느껴지지가 않아서요.
예술가로 하여금 스스로 경험해보지 못한 비극을 소재로 삼지 말라는 건, 과도한 엄숙주의를 넘어 자유의 침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기택네와 같은 상황에는 처해본 적이 없어서, 이 영화에서 가난이 사용되는 방식을 비판할 수 있는 개인적 자격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인물들이 자신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는 전부 가난과 결부되어 있으면서, 그마저도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져 있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저는 극장에서 터져나오던 웃음소리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가난이라는 건 하나의 '흥미로운' 소재 외에 달리 뭐가 될 수 있는 거지요. 이 영화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는 거지요. 무력감에 잠기도록 내버려두는 게 전부인가요. 정말 다를 수는 없나요.
--
이 글을 쓰기 위해 거쳐야 했던 여러 자기검열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 영화에 반대하는가. 그리고 왜 그걸 글로 쓰려고 하는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보이려는 욕구가 스스로 결론을 정해두고 근거를 끼워맞추도록 만든 건 아닌가. 이 글이 과연 몇 명에게 읽힐 거라고, 나까짓 게 반대한다고 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니, 애초에 예술이자 오락인 영화에 대해 반대한다는 표현이 성립할 수 있는 건가.
존경하는 감독님께서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간단명료한 선언 앞에서, 위에 적힌 모든 문장은 중심을 이루지 못하고 흩어집니다. 일종의 쉐도우 복싱이 되는 셈입니다. 창작자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데 왜 거기다 대고 지적질이야? 영화는 영화로 봐야지, 엄하게 사회와 정치를 결부시키지 말아라. 그러나 영화가 현실의 누군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빌려왔다면, 그들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지는 게 창작자의 윤리이진 않을까요.
창작자의 윤리 따위를 운운하는 건, 저 역시도 첫 단편을 준비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글이 곧 누워서 침뱉기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섯 번 죽었다 깨어나도 <기생충>처럼 뛰어난 각본은 쓰지 못할 테니까요. 이렇게 만듦새가 튼튼한 영화를 만들 수도 없을 테니까요. 감독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재능을 가진 주제에, 언젠가는 생각마저 바뀌어 버릴 수도 있겠지요. 다만 저는, 한 위대한 재능이 세상을 냉소하기로 마음먹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단언컨대 냉소는 예술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입니다.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시간이 지나 부끄러워져 삭제할지언정, 지금 부끄럽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