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는 흔히 서울 핫플레이스 3 대장 중 한 곳에 위치했다. 여기는 잠들지 않는 도시처럼 24시간 번쩍번쩍거리는 불빛과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노는 건 몰라도 살기엔 좀 부적합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는 휘황찬란한 번화가와는 조금 떨어져 꽤 조용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어 놀기에도 살기에도 좋다. 이사한 지 3년을 채우는 중, 최근에 다시 한번 '우리 동네만 한 곳이 없지'라는 생각을 들게 한 사건이 있었다.
아무렴 주택가라지만 우리 집 50m 근방에만 세탁소가 3개다. 한 블록에 동종업계가 다닥다닥 붙어있으면 수입에는 타격은 없나 괜한 걱정도 들었는데 3년째 망하는 곳이 없는 걸 보면 그럭저럭 괜찮으신가 보다. 무튼 처음 이사를 왔을 땐 세 곳 중 가장 깔끔해 보이는 세탁소에 옷을 맡겼다. 사장님은 다소 시크하셨지만 그런 요소가 은근히 신뢰감을 주기도 했다(?) 재방문 의사는 있었지만 일찍 문을 닫으시는 편이라 퇴근 후 맡기고 찾는 게 좀 버거웠다. 어쩔 수 없이 맞은편에 위치한 좀 더 푸근한 분위기의 세탁소로 옮겨갔다. 아침 일찍, 저녁 늦게까지 사장님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어서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제격이었다.
하루는 옷을 찾으러 가서야 현금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좀만 나가면 편의점이 있으니까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뽑아달란 얘길 들을 줄 알았는데 사장님은 '나중에 주세요'하고 흔쾌히 날 보냈다(?). 얼핏 보니 장부에는 옷의 주인, 맡긴 날짜, 옷의 종류 정도만 대충 휘갈겨 적으시는 듯했다. 그러니까 내가 돈을 낸 척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사장님의 말이 놀라웠다. 각박한 서울살이에는 기대하기, 마주하기 어려운 호의라서.
세 번째 세탁소는 원래는 방문할 생각조차 안 했다. 세 곳 중 가장 허름했고 가장 일찍 닫았기 때문이다. 괜찮은 곳이 두 군데나 있는데 굳이 모험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내 맘대로만 되나. 어느 날 퍽 마음에 들었던 여름 바캉스용 원피스 옆구리 부분에 있는 지퍼가 망가져버렸다. 나름 패션디자인이 전공이랍시고 나도 알았다. 원피스 속지퍼 수선하기는 난이도 높은 축에 속한다는 걸. 품절돼서 버리고 똑같은 걸 새로 살 수도 없었다. 엉엉. 속상해서 원피스 값만큼 내더라도 수선하고 싶어서 출근 시간에 두 번째 세탁소로 들고 갔다. 갔더니 드라이클리닝을 주로 전공하신 사장님이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내가 못 해'
네? 믿을 건 사장님뿐이었는데 다행히 사장님이 세 번째 세탁소를 추천하셨다. 그 집 아주머니는 수선하겠다며, 보아하니 출근길 같은데 자기가 대신 맡겨주겠다고 하셨다. 아무리 가게와 가게가 코앞 거리라지만 또 한 번 감동을 받았다. 거듭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밥벌이를 하러 갔다. 2~3일이 지나고 나서 세 번째 세탁소에서 옷을 수령했다. 만원도 안 되는 수선비에 원피스는 처음 살 때처럼 멀쩡해졌다. 슬프게도 원피스 자체가 내게 좀 타이트한 편이라서 금세 지퍼가 또 망가졌다. 아. 이제 너를 보내줘야 하나 싶은데 딱 두 번 입었다. 아쉬우니까 한 번만 더 수선해보지 하고 다시 세 번째 세탁소에 맡겼다.
당연히 수선비를 낼 생각이었는데, 사장님은 '아이, 어떻게 받아요.'라며 옷을 돌려주셨다. 오히려 다시 찾아오게 해서 미안하단 말과 함께 다시 다리미를 잡으시는데. 어슴푸레 날이 저무는 초저녁 시간, 집으로 가는 그 짧은 순간 어찌나 감상적이게 되는지. 우리 동네 세탁소 사장님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이 동네가 참으로 좋아진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