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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el Apr 17. 2016

쾌락의 이면을 말하다

마음이 구멍 난 현대인의 단상을 그린 영화 <Shame>

최근 KU 시네마트랩에서 마이클 패스벤더 기획전이 열렸다. 최근 개봉작 스티브 잡스부터 헝거까지 그의 필모 중에서도 작품성이 좋기로 소문난 영화들이 선정되어서 더욱 반가웠다. 그중에서도 오늘 쓰고자 하는 영화는 셰임(Shame, 2011)이라는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마이클 패스벤더라는 배우의 매력을 알게 된 계기이자, 이따금씩 꺼내 보는 작품이다. 이미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 영화는 반복해서 감상하기 좋은(?) 영화는 아니다. 단적으로 네이버 영화에는 '수많은 섹스 장면들이 나오는데 성욕감퇴로 이어지는 신기한 현상. 오히려 지켜보기 괴롭다. 공허한 아름다움을 잘 찍어냈다'라는 평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칙칙하고 어두운 정서의 영화를 자주 꺼내보는 이유가 뭘까?

관계에 정착하지 못하는 남자
관계에 집착하는 여자
영화의 첫 장면

영화의 중심인물은 브랜든과 그의 여동생 씨씨다. 먼저 '브랜든'은 뉴욕의 여피족(yuppies)으로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색정증 환자다. 각종 형태와 장르의 포르노를 섭렵하고 밤마다 매춘부를 불러내거나 원나잇을 통해 성욕을 해소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비정상적인 성관계에 한해서만 성욕을 해소할 수 있다. 하루는 자신에게 호감을 표한 직장 동료와 데이트를 하며, 처음으로 진지한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는 이성을 만난다. (가장 오래 만난 기간이 3개월이라고는 하지만 이조차도 믿음직스럽지 않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녀와 거사를 치르기 전, 그의 생식기관(?)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의 성욕에는 이미 비정상적인 내성이 자리 잡힌 탓이었다. 그렇게 그는 어쩌면 유일할 지도 모르는 관계를 놓치고 만다. (그녀는 괜찮다고 해줬지만)


데이트도 필요없고 그저 곁에만 있게 해달라는 씨씨

그와 달리 '씨씨'는 전형적인 애정결핍 환자이다. 그는 처음 만난 남자에게도 쉽게 마음을 내주고, 누가 봐도 끝이 보이는 관계도 쉽게 놓질 못한다. 전화로 이별을 고하는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그저 곁에만 남게 해달라고 눈물을 쏟는 장면에서 그녀의 결핍이 단적으로 보인다. 더욱 가관인 점은 오빠의 직장 상사와의 관계다. 씨씨는 본래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는 가수로, 뉴욕의 공연이 잡히자 브랜든을 초대한다. 브랜든은 자신의 상사와 동행하는데, 그 상사는 총각 행세를 하는데 아주 유능한 유부남이었다. 그리고 이는 부하의 여동생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씨씨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라면 열정적으로 마음을 내어주기 때문에, 오빠의 집에서 오빠의 상사와 섹스를 한다.

    그 적나라한 과정을 브랜든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물론 성인인 여동생의 성생활에 관여할 수 없는 것도 이유겠지만, 결정적으로 그 상대가 상사인 점이 클 것이다. 상사의 문란했던 과거 전적과 앞으로 상처를 받을 여동생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서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게 당연했고, 이는 씨씨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씨씨는 용서를 빌지만 브랜든은 내 인생을 망치는 너는 필요 없는 존재라며 그녀를 힐난한다. 잔뜩 상처를 받은 그녀는 묻는다. '서로에게 하나뿐인 가족인데 내가 사라져도 좋겠냐고.'


나는 브랜든일 수도
씨씨일 수도 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아냐, 상처받은 사람이지 - 영화 中 씨씨의 대사

이후 브랜든은 집을 뛰쳐나가, 아무 여자에게나 자고 싶다며 수작을 부리거나 동성과 관계를 맺기도 하고 혹은 사창가를 전전하면서 성욕을 해소하기도 한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쾌락 같지도 않은 쾌락을 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그는 누군가 선로에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치솟고 씨씨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받지 않는다. 그리고 집 욕조에 손목을 긋고 피투성이가 된 씨씨를 발견한다. (씨씨의 생사 여부 확인은 앞으로 영화를 감상할 사람의 몫으로 남기겠다.)

    이렇게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듯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결핍된 사람들이란 점에서 같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보여지고 있지만 그들이 겪는 결핍이 우리에게도 그리 먼 얘기는 아닐 것이다. 아니, 적어도 나에 한해서는 그렇다. 내게 공허함 혹은 고독감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과는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많은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도 공허함과 고독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건드리곤 한다. 그래서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잠깐이라도 쾌락을 혹은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습관적으로 찾는다. 브랜든이 매일 밤 매춘부를 부르는 것처럼, 씨씨가 잠깐의 만남에도 집착하는 것처럼.


SHAME을 꺼내볼 수밖에 없는 이유

Oxford 사전에 따르면 Shame은 'A painful feeling of humiliation or distress caused by the consciousness of wrong or foolish behaviour'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해석하자면 스스로가 잘못된 행동이나 과오를 인지함으로써 느끼는 고통 혹은 후회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김혜리 씨는 'shame'이 영화를 정확히 꿰뚫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을 '이 단어가 가리키는 수치심은 누군가가 내 치부를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심장 옆에 묵직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부끄러움에 가깝기 때문이다'이라 밝힌다. 따라서 shame은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는 감정인 셈이다.

    구멍 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다른 곳을 구멍 내는 브랜든과 씨씨를 보면서 반면교사로 삼기도 하고 나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들추어보기도 한다. 혹은 이런 감정을 느끼는 존재가 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느끼면서 위로받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극심한 감정 소모에도 불구하고 셰임을 종종 꺼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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