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에 다녀오는 영화소풍
2년 전 런던 여행에서 야외극장을 가려고 했었다.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런던에서는 옥상, 공원 심지어는 서머셋 하우스 같은 관공서 마당에서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그땐 스케줄 상 도저히 안될 것 같아서 포기했지만 아직도 언젠가는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런던의 야경을 배경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설레지 않은가.
그런데 얼마 전 무주산골영화제를 갔다 와서, 마음 한 켠에 남아있는 미련과 아쉬움을 나도 모르게 달래 버리고 말았다. 정확히는 영화를 보다 잠시 고개를 드는 순간,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는 순간 그리되었다.
보통 국내에서 영화제 하면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혹은 부천판타스틱영화제가 생각날 것이다. 무주산골영화제는 이제 5회를 맞이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겐 낯설거라 생각된다. 나도 일부러 영화제를 찾아보면서 우연히 이 영화제에 대해 알게 됐다. 어쨌든 다녀온 사람들 평도 좋고 무주까지 가는데 오래 걸리지도 않고 무엇보다 영화제가 선착순 무료입장이다! 두말 않고 꼭 가야겠다 싶어서 친구들을 포섭했다. 그녀들도 산골과 영화제라는 이 낭만적인 조합에 끌릴 수밖에 없었는지, 금세 신나서 숙소와 교통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올해 무주산골영화제는 6월 2일부터 6일까지 총 5일 동안 진행됐고 설렘존, 울림존, 어울림존 총 3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상영이 이뤄졌다. 낮에는 실내 상영을 하다가 밤이 되면 야외상영을 시작한다.
다른 건 몰라도 야외상영을 봐야겠다는 건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어서 숙소는 자연스레 덕유산 근처로 알아보게 됐다. 평일에 시간 내기 어려웠던 우리에게 유일한 옵션은 3,4일 주말뿐이었고 그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근처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는 금세 다 예약이 찼었다. 우리는 게하가 없다면 이왕 가는 거 분위기 내보자는 생각에 돈을 좀 더 내더라도 글램핑을 하기로 했고 정직한 그 이름, 무주글램핑 숙소를 예약하였다.
남은 건 교통편이었는데 다행히도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양재에서 무주까지 대중교통보다 저렴한 가격에 셔틀버스를 제공한다. 나는 버스보다 기차가 타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서울역에서 대전까지 무궁화호를 타고 대전에서 무주행 시외버스를 타는 비효율적인 루트로 갔다 왔지만. 무튼 2시쯤 무주에 도착했더니 실내 상영은 보기 애매해져서 무주 등나무운동장에서 잠깐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곳에선 영화 음악을 테마로 하는 공연의 리허설이 이뤄지고 있었다. 파라솔 밑에 돗자리를 펼치고 수다도 떨고 누워서 휴식을 취했더니 어느새 숙소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 됐다. 순환 셔틀을 타고 40분쯤 지나면 덕유산 국립공원 근처에 내릴 수 있다. 글램핑장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저녁을 먹은 후에 패기롭게 맥주 한 캔을 들고 15분 거리의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매표소를 지나치는데 직원 분이 설마 걸어가는 거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거리에 대한 감각이 없던 우리는 단순히 앞의 커플도 걸어가니 무작정 걸어갔지만 그건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운 좋게도 길목에서 셔틀버스 기사님이 우릴 발견하고 태워주셔서 그나마 편하게 도착했지만 말이다. 하하
국립공원 대집회장에 도착해 돗자리에 앉아 미리 사놓은 간식과 맥주를 꺼내놓고 나니 어느새 숲이 어두워졌고 곧이어 스크린에는 존 카니 감독의 '원스'가 상영됐다. 참고로 아무리 여름이어도 산은 산인지라 밤에는 몹시 춥다. 우리는 후리스와 손난로, 담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니 망정이지. 방심했다면 영화를 다 보기도 전에 추워서 다시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다. 실제로 중간에 돌아간 사람도 꽤 있었다.
어쨌든 야외상영에 엄청난 로망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너무 낭만적인 관람환경이었다. 특히 무주는 반딧불이 명물인 정도로 공기가 좋아서 밤하늘에 별을 가득 품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손으로 북두칠성을 따라 그려볼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바로 숙소로 돌아가기는 아쉬웠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숙소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무주산골영화제가 좋았던 점은 라인업이 꽤 알차다는 것이다. 대중적인 취향에서 너무 동떨어져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상업영화만 줄곧 틀어놓는 것도 아니다. 라라랜드를 비롯해서 시티라이트, 헤드윅, 나 다니엘 블레이크, 어느 날 등등 다양하고도 폭넓은 장르의 영화들을 다룬다는 게 참 좋았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 6월, 두 시간 정도만 시간을 투자하면 별들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 비교적 가볍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인, 친구 혹은 가족과 즐기기에 딱인 영화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