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의 테라피스트, 레고
레고 박스에 적혀있는 '6세 이상'이란 말은 그 연령대가 주로 갖고 논다는 뜻이 아니라 '6세 이상부터 만족한다'는 의미다.
워낙 이것저것 세상만물에게 잘 빠지고 모으는 나지만 올해의 신흥 강자는 단연코 레고다. 한 두개 사면 좀 식을 줄 알았는데 주변에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더라. 히히. 그래도 시작은 꽤(?) 가벼웠다. 아이디어 시리즈 중 하나이자 비틀즈 팬의 마음을 살살 간지럽혔던 21306 Yellow Submarine. 아기자기하고 동화같은 색감에 유튜브에 공개된 프로모션 영상 덕분에 꽤 인기를 끈 모델이다.
마침 올해 1월 회사에서 생일이라고 문화상품권을 주길래 그걸로 샀다. 브릭수가 많은 편은 아닌데 정말 귀여운 모델이라 3초마다 3옥타브 내지르며 재밌게 조립했던 기억이 난다. 이 맛을 잊지 못하고 레고에 슬슬 마음을 내주면서 도저히 사지않고는 못 배기겠는 모델을 만나버렸다. 바로 소녀들의 고향, 71040 Disney Castle.
출시 전부터 어떻게 소식을 주어듣고 가격을 맞닥뜨린 순간. 가격대가 쎄긴 하지만 못 살 정도는 아니라며 차곡차곡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올해 8월에 위의 모델을 구매했다. 눈물을 머금으면서 한정판 LP와 콘서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레고용 쌈짓돈을 필사적으로 사수한 끝에 말이다. 막상 사보고나니 어마어마한 크기에 눈앞이 흐려지는 브릭수에 조립은 언제 하나 걱정도 들었지만 완성을 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평일 저녁 이틀과 주말 하루 그리고 10개의 지문을 투자하여 3일만에 영롱하고 완벽한 캐슬님의 자태를 영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비교적 높은 가격대의 레고를 샀으니 당분간(?) 별 생각이 없겠지 싶었는데 금새 손이 근질근질해지고 급기야 모듈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듈러는 일년에 딱 하나만 출시되고, 레고 커뮤니티에서 정교한 디테일로 마니아들에게 사랑받는 시리즈다. 매일 매일 사람들 조립 후기만 찾아보다가 결국 중고로 '파리의 레스토랑'을 저렴하게 하나 구했다. 중고 특성상 브릭 누락이 불안하긴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1x2 크기의 작은 브릭이 두어개 정도 안 보였다. 다행히 레고 본사에 신청하면 2~3주내로 배송해준다고 하길래, 레고 코리아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조악하게 번역되어있는 홈페이지 메뉴들에서 '브릭 앤 피스'를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그걸 Brick & Peace 라고 읽었다. 곧이어 Brick & Pieces라는걸 알아차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린 레고의 정의 그 자체였다. 정말로 레고를 조립하는 동안은 너무 평화롭다. 온 몸에 찐득찐득하게 묻어있는 피로도 금새 잊고 조립 설명서에만 온전히 집중하면서 손 끝이 아릿할 때까지 조립하는게 어찌나 즐겁던지. 브릭이 쌓이는만큼 성취감도 쌓이면서 어느새 그럴 듯한 물건(?)이 완성되면 빨리 조립이 끝난게 아쉽기도 하다가 곳곳의 디테일을 뜯어보며 뿌듯함을 느낀다. 안타깝게도 파리의 레스토랑 조립 이후로는 정말로 집에 놓을 공간이 없어서 더 이상 구매하는 건 자제하기로 했지만 종종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다. 언젠가는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 세계가 합쳐져 있는 디오라마를 완성하리라 다짐하면서 이 말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Brick &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