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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el Nov 18. 2017

봄날을 닮은 노부부의 로드트립

영화 'The leisure Seeker'를 보고

올해 목표 중 하나가 부산국제영화제 가보기였는데 이번에 짬을 내어 친구 혜린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둘 다 일에 치이는 와중에 Yolo로 살아보겠다고 친구는 출장 중에 황급히 노트북으로 예매를 강행, 나는 그마저도 회의에 불려 예매 실패하여 틈날 때마다 양도를 구걸해 총 3개의 영화를 예매했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그녀의 인생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 그리고 '레저 시커'. 마지막으로 관람한 레저 시커는 일요일 늦은 시간 끝나는 영화라 표가 꽤 많이 남았었다. 이왕 온 거 3개는 보고 싶었고 헬렌 미렌과 도널드 서덜랜드 주연이라니까 좀 늦게 돌아가더라도 보기로 한 건데 결론적으로 가장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기억해주지 않더라도,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내 엘라(헬렌 미렌)은 젊은 시절 여행을 함께 했던 캠핑카 '레저 시커'를 타고 남편 존(도널드 서덜랜드)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키 웨스트에 위치한 헤밍웨이의 집을 향해 길을 나섰다. 부모님을 모시러 온 아들은 텅텅 비어버린 집과 차고를 보며 패닉에 빠지고 황급히 누나에게 연락한다. 부모님이 사라졌다며! 그도 그럴 것이 노부부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엘라는 암에 걸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고, 존은 치매에 걸려 남은 기억이 얼마 없었다. 그래서 엘라는 더 하루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존은 어디를 가는지, 가끔은 자신조차 까먹어 속상하지만 언제나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인 건 변함없다. 잠깐 한눈을 팔 사이에 존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행인들에게 이렇게 묻는 걸 보면 말이다. '훤칠하고 잘생긴 우리 남편을 못 보았느냐고.' 마찬가지로 존도 엘라에 대한 열렬한 애정은 치매와 상관없이 가슴 깊숙이 있는 모양이다. 몇 십년 전 일인데도 여전히 엘라의 첫사랑을 의식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노부부의 여행 중 가장 따뜻한 순간은 고된 하루의 끝에 찾아온다.

바로 마당 앞에서 빔프로젝터로 옛 사진을 비춰보며 추억을 그리는 시간.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진 존을 위해 엘라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남편이 사진을 보며 기억해주자 엘라는 아이같이 좋아하기도 한다. 이렇게 따뜻한 순간만큼이나 황당하고 가슴이 철렁한 순간들을 거쳐 그토록 기대했던 키웨스트에 도착한다. 기대와 다른 모습에 엘라는 남편을 대신해 실망하는데, 그동안의 여행이 몸에 무리를 주었는지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홀로 구급차에 실려가면서도 존을 걱정하는데, 정작 존은 이곳이 헤밍웨이의 생가인지조차 관심 밖이고 그저 뒤뜰에 열린 결혼 피로연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다. 다행히도 아내가 사라졌다는 느낌은 들었는지, 주변 사람에게 수소문하여 아내가 입원한 병원을 겨우 찾아낸다. 누워있는 엘라는 병원에서 죽을까 봐 무서웠다며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람들 몰래 병원에서 둘만의 레저 시커로 돌아간다. 진정한 의미의 레저 시커로.

시간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

황혼기 부부의 로드 트립을 다룬 영화라 그저 잔잔하고 슬픈 영화로만 예상됐는데, 시종일관 웃느라 감동적인 장면에서 울 타이밍을 놓칠 정도였다. 예측이 쉬운 전개였으나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를 두 배우의 연기로 유쾌하게 풀어낸 게 이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봄날같은 노부부의 로드 트립이란 제목을 붙였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한, 아지랑이를 보는 듯한 따스한 느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저렇게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레저를 울부짖는 두 젊은이들에게도 짧은 휴식을 주는 영화였다. 마지막으로 책 '라틴어 수업'에서 읽은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Tempus fugit, amor manet (시간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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