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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el Dec 31. 2017

시로 빚어내는 일상의 적요

영화 '패터슨'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이 즐겨 읽는 시집에 나 또한 마음에 드는 시가 있고, 주말 아침 사랑하는 이가 읽어준다면 크고 큰 축복이고 행복일 것이다.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의 일주일을 그린 영화 '패터슨'을 보고 나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이 한 편의 영화로 당신의 하루가 아름다워질 거라는 포스터에 적힌 문구가 참 적절한 이 영화는 심심한 듯해도 향긋하고 싱그러운 봄나물 요리를 먹는 듯한 사랑스러운 영화다. 도저히 음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그런.

평범함이 가진 아름다움

패터슨 씨의 일상은 아침 6시 15분쯤 눈을 뜨면서 시작된다. 침묵의 마법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다음, 곁에 잠들어 있는 아내 로라에게 굿모닝 인사로 짧은 입맞춤을 한 다음 부엌으로 내려가 커피를 마신다. 유니폼을 입고 아내가 싸준 도시락통을 들고 집을 나서서 회사로 향한다. 매일매일 같은 코스를 돌아야 하는 버스 기사인 그는 뒷자리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치 우화를 듣는 것처럼 소소한 즐거움을 느낀다. 무정부주의자든 동향의 복싱선수에 대한 얘기들은 그의 단출한 일상을 채워 넣는다. 곧이어 점심시간이 되면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면서 자신의 비밀노트에 시를 적어 내린다. 오후의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아내 로라가 자신을 반긴다. 틀에 박힌 패터슨의 일상과 판이하게 로라는 매일매일이 바뀌는데, 오늘은 자신이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해 사랑스럽게 재잘거리는 걸 들어준 다음 강아지 마빈과 함께 저녁 산책을 갔다 온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펍에 들려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 한 잔을 가볍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잠에 든다. 영화에서 보이는 일주일 동안 그의 일상은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금씩 달라지는 건 있지만 3일쯤 지나면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그의 비밀노트에 적힌 시에서 그의 일상의 작은 변주를 알아차릴 수 있다. 처음에 그는 집안에 나뒹구는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요즘 우리가 좋아하는 제품은
오하이오 블루 팁
진하고 옅은 청색과 흰색 로고가
확성기 모양으로 쓰여 있어
더 크게 외치는 것 같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 있어요'
차분하고도 격렬하게 
오롯이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담배에
불을 붙일지도 몰라요
난생처음이자 앞으로도
다시없을 불꽃을

아침을 먹다가 문득 성냥갑이 눈에 들어오고, 어느 날에는 아내와 이 성냥갑의 로고는 마치 확성기 같다고 대화를 나눴던 게 기억난다. 그는 틈이 생길 때마다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에 대한 생각을 시로 빚어낸다. 집으로 귀가하자 아내는 오늘 시를 썼냐고 묻고 그는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에 대해 썼다고 대답했다. 아내는 우리가 말했던 확성기 모양에 대해서도 적었냐고 되묻는다. 이 순간 나는 이 영화에 반한 거 같다. 평범한 일상에서 자기만의 즐거움을 찾고 글로 남기고, 그걸 기다리고 교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래, 이런 게 행복 이지하며 패터슨 씨가 몹시 몹시 부러워지고 말았다. 


마무리하며

감상을 적고자 영화 줄거리를 천천히 생각 해내 보려고 했는데, 다른 영화들과 달리 기억에 뚜렷하게 남는 부분이 없다. 다만 기억해내려고 하는 순간 아지랑이 같은 희미하고 따뜻한 행복감만이 전해진다. 바로 그게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랄까. 짐 자무쉬 감독은 패터슨을 두고 자극적인 영화들 사이에서 해독제 같은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그의 말대로 이렇다 할 내용이 없는데도 어느샌가 행복해지는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내 일상도 저런 작고 조용한 즐거움들이 나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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