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Call me by your name'을 보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주는 게 이토록 설레고 두려운 일이라는 걸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Call me by your name'을 보고 나서 말이다. 사랑이 가져다주는 열병에 면역력이 없는 소년과 결말을 짐작하고도 전복되고 마는 청년을 그린 이 영화는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 일색이다. 특히 17세 소년 엘리오 역의 티모시가 선보인 연기와 사운드트랙이 아름답다는 평이 많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한여름밤의 첫사랑, 성장통이 잘 표현됐다랄까.
감상 후 한동안 문득문득 둘의 표정이, 감정이 떠올라서 일에 쉽사리 집중하기 어려웠다. 원작 소설도 읽어보고 올리버 역의 아미 해머가 읽어주는 오디오북도 충동적으로 구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이야기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글을 쓰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 브런치를 열었다. (아래의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우주의 물음표는 오직 당신임을
지금의 나는 사랑과는 가장 먼 거리에 존재하는 사람이지만, 오래전 사랑에 빠졌던 기억을 끄집어보자면 한 마디로 하루 종일 상대방에게 잠식됐었다. 누에가 뽕잎을 먹듯이 서서히 서서히. 내 일상은 그 사람을 축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기분은 들쭉날쭉했다. 1983년 이탈리아 북부 어딘가에서 따갑고 따분한 여름을 보내던 소년은 이를 예상치 못했다. 자신을 온종일 흔드는 존재가 나타리라곤.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여름과 겨울마다 부모님과 별장에 머무른다. 그중 여름에는 아버지의 연구를 도울 누군가가 초대되어 함께 시간을 보낸다.
1983년의 여름 별장에 초대받은 이는 올리버(아미 해머)라는, 훤칠하지만 미국인 특유의 거만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엘리오는 올리버가 도착하자 자신이 쓰던 방을 내주고 그 방과는 욕실이 연결된 옆 방을 쓰기로 한다. 더불어 시내를 구경시켜주는 일도 엘리오의 몫이었다. 둘은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섰다. 야외테이블에 앉아 짧은 대화를 마치고 올리버는 자전거를 타고 홀로 훌쩍 떠난다. '나중에!'라는 말과 함께. 엘리오는 그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전거에 오른다. 내겐 아직 낯설고 묘한 존재는 순식간에 부모님은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얻는다. 잘생기고 지적인 데다가 사교적인 사람이니 말이다. 반대로 가장 가까이에 머무는 엘리오와 올리버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엘리오는 저녁 식사시간에 그가 오는지가 너무나도 궁금하면서도 겉으로 티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자신의 친구와 잘해보라면서도 은은하게 심술을 부리자 급기야 올리버는 친절하게 굴 필요 없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시간이 갈수록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빠져들어가는데 올리버는 자신을 싫어하는 듯하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올리버가 자길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어쩌면 엘리오보다 더. 믿기진 않지만 점점 커져가는 감정에 괴로워하다가 비가 세차게 퍼붓는 어느 날, 부모님 품에 안겨 기사와 공주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길 듣는다. 기사는 들끓는 연정에 못 견디고 공주에게 묻는다. 말하는 게 낫습니까, 아니면 죽는 게 낫습니까? 엘리오는 자기라면 절대 그런 질문을 할 용기조차 없을 거라 하자 아버지는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고 한다.
그 후로 시내에 함께 나선 날 엘리오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올리버는 그를 애써 부정하려 하지만 그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충동적으로 입 맞추고 만다. 시대적인 배경상 환영받을 수 없기에 더 이상은 진전시키지 말자고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올리버가 의식적으로 자신을 피하자 엘리오는 쪽지를 남긴다. 침묵을 견딜 수 없으니 이야기를 하자고. 그 답으로 '철 좀 들어, 자정에 보자'라는 쪽지를 받고 나서 엘리오의 모든 신경은 시곗바늘에 쏠렸다. 자정. 자정. 자정!
영혼의 장작
달빛이 비치는 테라스에 올리버가 서있었다.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둘의 관계에는 답이 내려졌다. 다만 그렇게 기다렸던, 환희로 충만한 밤을 보내고서 엘리오는 급격하게 불안정해졌다. 이런 감정을, 일을 겪어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말이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엘리오를 보면서 올리버는 혹시나 자신 때문에 엘리오가 자신과 잠자릴 가진 것을 후회할까 봐, 망쳤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워졌다. 엘리오는 그저 그토록 갈망하던 애정을 받았으나 곧 올리버가 미국으로 돌아가면 도리어 이 애정이 자신의 마음을 산산조각 낼 걸 알기에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그에게 차갑게 굴었던 것이다. 다시 마음을 확인한 후 올리버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둘은 짧은 여행을 떠난다. 애써 억지로 외면하려 했던 날들이 아까워, 더 표현하지 못하고 나누지 못했던 날들이 아까워 말이다. 그러나 이도 잠시 이별의 순간이 찾아오고 서로가 서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만다. 올리버는 엘리오가 잠잘 때, 엘리오는 올리버가 떠난 기차역에서.
그가 탄 기차가 떠난 지 한참 돼 보이는데 엘리오는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선로를 한참 바라보다 역내 공중전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건다. 울먹거림과 함께 자신을 데리러 와줄 수 있냐고. 눈물을 애써 삼키려 하지만 아들의 충혈된 눈동자를 보고 아버지는 지나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는 말과 함께 아들을 위로한다. 둘의 우정은 정말 드물고 특별하다고, 아니 어쩌면 우정 이상의 관계일지도 모르니 앞으로 아주 힘든 시간이 찾아올 거라고. 아버지가 둘의 관계를 눈치채자 놀란 엘리오를 보며 아버지는 말을 이어나간다. 보통의 부모라면 이를 묵인하고 자식이 제자리로 돌아오길 기다리겠지만 자기는 그런 형편없는 부모가 아니라며, 앞으로 찾아올 괴로운 감정을 애써 삭히고 잔혹하게 대하면 서른쯤 네 영혼은 닳아 없어져 누군가에게 다시 마음을 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평생 한 번만 주어지는 만큼 자기 안으로 침잠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몇 년쯤 지났을까. 눈이 나리는 겨울에 엘리오는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올리버의 결혼 소식이었다. 잠깐의 침묵 후 엘리오는 부모님이 우릴 사이를 안다고 밝히자 올리버도 그때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마치 사위처럼 챙겨주었다며 좋은 부모님을 만났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순간을 잊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통화는 끝난다.
마무리하며
둘의 관계에 답이 내려지던 그 날 올리버는 말한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널 부르겠노라고. 그대가 내가 되고 내가 그대가 되는, 이토록 드물고 특별하고 아름다운 관계에 심취했던 나머지 둘의 이야기가 꼭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앞서 이를 달래려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적었지만 지금은 상관없다고 느껴진다. 도리어 더욱더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듯한 기분이었으면 좋겠다. 엘리오 아버지 말대로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서른 살쯤엔 껍데기만 남은 사람이 되지 않게 말이다.
P.S. 피아베 전투 동상 앞에서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자신의 감정을 밝히는 장면에 이어서 엘리오가 고개를 들어 교회 십자가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머릿 속에 구원이란 단어가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