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개띠 남성 두 분의 환갑 기념 오사카 여행기
둘째 날이 밝았다. 자고 있는 사이에 누가 8톤 트럭으로 깔고 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 몸이 쑤셨다. 호텔 조식은 신청하지 않았고 침대에 누워서 어제저녁에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샌드위치와 음료수로 때웠다. 뒹굴거리다가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나왔다. 오후 3시쯤 료칸이 있는 아마미 역으로 가야 하는데 그때까지 짐을 맡겨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호텔에서 걸어서 10, 15분쯤 걸리는 츠텐카쿠에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어르신들이 잔뜩 모여있길래 슬쩍 봤더니 분라쿠 극장이었다. 옛날 종로거리를 연상케 하는 페인트 간판의 극장들이 곳곳에 있자 어른들이 신나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실 츠텐카쿠는 시간이 남고 거리도 가까워서 아무 생각 없이 넣은 코스였는데 생각보다 어른들의 반응이 좋아서 놀랐다.
앞서서 츠텐카쿠에서 점심 먹을 식당을 알아봤는데 쿠시카츠 맛집이 대부분이었다. 흠. 맛있겠지만 어른들이 생각하는 식사 개념에선 좀 떨어지는 느낌이야. 고민 끝에 오코노미야키 식당 후게츠와 직접 생선을 낚아서 먹을 수 있는 횟집 츠리키치로 선택지를 좁혔다. 개인적으로 후자가 끌렸는데 어른들이 귀찮아할까 봐 오코노미야키를 먹으려고 했다. 그 얘길 하니까 갑자기 삼촌이 거기 미운우리새끼에 나온 곳 아니냐며 반가워했다. 토니안이 갔대나 뭐라나. 낚시를 좋아하는 아빠도 뭐가 귀찮겠냐며 흥미를 보였다. 츠텐카쿠에 이어 다시 한번 얻어걸린 열렬한 반응이었다.
점심 먹기는 좀 이른 시간이지만 생선 잡고 기다리고 그럼 얼추 배고프겠지 싶어서 11시에 바로 들어갔다. 아빠와 삼촌이 낚시하는 동안 나머지는 앉아서 쿠시카츠와 술을 먹기로 했다. 아빠가 몇 번 놓치자 낚아서 먹기는 그른 것 같아 그냥 단품 메뉴로 회를 시키자마자 아빠가 도미 한 마리를 잡았다. 종업원에게 반은 회로 반은 초밥으로 만들어달라고 말하고 본격적으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삼촌이 어제는 일정이 힘들었는데 오늘은 여유로워서 좋다며 우리 가이드가 참 노련하단다. 즐겁고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길을 좀 돌아가서 오래된 사찰 시텐노지와 케이타쿠엔 정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츠텐카쿠 바로 옆에는 덴노지 동물원과 시립미술관이 있는데, 거기에서 더 가면 케이타쿠엔이 나온다. 원래는 일본 재벌가의 정원이라고 하는데 오사카의 숨은 명소다. 볼거리가 화려하고 많은 곳은 아니지만 한적하게 휴식하기 참 좋다. 소담하게 꾸려진 정원을 보면서 가이드로서의 긴장을 좀 풀었다. 다행히도 첫째 날보다 둘째 날이 날씨가 더 따스했다. 갑자기 아빠가 날 걱정하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커피를 한 잔 마셔줘야 하는데!' 지난 부산 여행에서 커피를 안 마시자 급격하게 기운이 떨어지고 칭얼거리는 내가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아주 정확한 진단이었다. 너무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자판기 커피로는 안된다. 얼음과 크레마가 가득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너무나도 간절해졌다. 꾹꾹 참으며 시텐노지를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기로 했다. 히히.
시텐노지는 매달 21일마다 아주 크게 벼룩시장이 열린다는데 평소에도 혹은 주말에는 작게 벼룩시장이 열리는 모양이다. 잼, 차, 액세서리 등 다양한 물건들을 파는 매대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삼촌네는 별로 흥미가 없어 보여 간단하게 마실 나온 사람처럼 구경을 마치고 짐을 찾으러 호텔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엔 눈에 띄게 기력이 떨어지는 가이드를 불쌍하게 여기는 다섯 명이 카페를 열심히 찾아주셨다. 아주 잠깐 가이드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짐을 얻은 우리 일행은 난바역에서 아마미 역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창 너머 오사카의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40분쯤 지났을까. 정말 시골역이라는 게 물씬 풍겨지는 아마미 역에 도착했다. 어른들은 '어머, 진짜 시골역이야'이라며 웃기 시작했다.
역을 빠져나오면 바로 멋들어진 난텐엔 료칸이 나온다. 다들 감탄을 자아내며 구경하는데 스태프분들이 반갑게 환영해준다. 큰 방과 작은 방을 안내해주셨는데 큰 방은 삼촌네가, 작은 방은 우리가 쓰기로 했다. 작기는 해도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저녁 6시에 큰 방에서 함께 가이세키를 먹기로 했고 그동안은 료칸 주변을 구경하기로 했다. 호화로운 대접과 황홀한 풍경에 어른들의 표정이 잔뜩 상기됐다. 후후, 이게 나의 빅픽쳐였지. 료칸에서 제공하는 유카타를 입고 정원을 한가롭게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금세 저녁 6시였다.
자리에 앉자 애피타이저와 국이 먼저 차려졌다. 회, 나물 요리, 구이, 절임 등 솔찬히 펼쳐지는 식사에 나도 그랬지만 어른들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패키지 여행과는 다른 자유여행의 매력에 푹 빠진 삼촌은 급기야 다음에는 친척끼리 괌을 갈 예정인데 비용은 내지말고 동행하라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촌언니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별로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라며 건방지게 돈을 주시면 생각해보겠다고 했는데도 어른들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외의 반응에 당황스러워서 이번 여행이 너무 좋으셔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내일 엄청난 강행군으로 모두의 다리를 작살내겠다고 했지만 모두들 깔깔깔 웃으며 넘겼다. 식사를 마치고나선 온천의 따뜻한 물로 피로를 풀기로 했다. 뽀송한 기운으로 마시는 맥주를 생각하니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완벽한 일정이야라며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에 돌아가니 역시나 료칸답게 침구가 미리 깔려져있었다. 이런 대접엔 영 익숙치않는 부모님은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온다고 웃었다. 오사카의 둘째 날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마지막 날에는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일기예보를 보긴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가랑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사실 사촌언니와는 오전에는 잠깐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었다. 고즈넉한 료칸에서 빗소리를 듣고 싶어서. 체크아웃전까지 딱 원하던 풍경을 마음껏 즐기고 다시 난바행 전철을 탔다. 순탄히 지나가나 했더니, 얼마 지나지않아 아빠가 가방이 없다며 소리쳤다.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풍경을 감상하느라 의자에 가방을 놓았는지, 하필 또 여권이 거기에 있어서 다들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단 바로 역에서 내려서 역무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무인 역이다보니 CCTV로 플랫폼을 확인하는데 잘 보이지 않는단 답변을 들었다. 바로 료칸에 전화를 걸었다. 다시 돌아가려면 10,15분정도 걸리는데 그 사이에 가방이 사라질까 싶어서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확인해주겠다며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셨다. 나머지는 짐과 함께 역에 남아있고 아빠와 나만 다시 아마미역을 돌아가기로 했다.
아빠는 불안한 얼굴로 가방이 사라지면 어떡하냐고 걱정했다. 여권이야 다시 임시 발급하면 되니까 일단 가서 생각하자고 그리고 첫 해외여행에 이런 경험이 있어야 다음부터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다며 아빠를 달랬다. 다행히 료칸 직원의 도움 덕분에 무사히 가방을 찾고 다시 일행이 있는 역으로 돌아갔다. 난바역에 도착할 때쯤엔 비가 그치기를 바랐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가방 찾느라 시간을 조금 까먹은 탓에 쿠로몬 시장을 가려던 계획을 바꿔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기로 했다. 각자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사고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금세 오후 4시였다. 조금 이르게 공항에 도착해서 면세 쇼핑까지 마치자 드디어 58년생 개띠 남성 두 분을 위한 환갑여행이 끝났다. 여행을 맘 편히 즐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즐거워하는 어른들의 표정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다며 짧은 오사카 여행기를 마친다.
P.S.
다음날 출근길에 사진과 함께 엄마의 환갑 여행도 부탁한다는 삼촌의 카톡을 받았다. 그리고 글을 쓰는 오늘은
올 가을 아빠의 환갑여행을 위해 또다시 예약 메일을 한참 뿌리고 있다. 스위스에서 샬레를 운영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분들은 이 영혼을 불쌍히 여겨 예약을 받아주셨으면 좋겠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