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서가 배치와 동선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
도서관 서가 배치와 동선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
그렇게 생각했다.
공공도서관은 일단 존재만 하면 제 몫은 하는 거 아니냐고.
근사할지 말지, 세련될지 말지의 차이지 대단한 차이는 없을 거라고.
그동안 수많은 도서관과 서점을 방문했다.
그러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직접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이용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그 와중에 싱가포르의 공공 도서관 몇 곳을 경험하면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은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
해야 할 일 천지다.
그중 비교적 단순한 편에 속하는
도서관의 동선에 관한 생각만 모아봤다.
이용자들의 편의, 효율성뿐 아니라 안전과도 관계있는 중요한 문제.
국내 도서관의 전형적인 서가 배치
사서 출신 작가가 펴낸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책의 표지 이미지에 실린 도서관 도면이다.
전형적인 도서관의 서가와 테이블 배치. (직사각형은 이용자들이 앉아서 책을 읽는 테이블, 짧은 실선들이 서가다.)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시립도서관, 현재 재학 중인 대학도서관의 자료실 배치도 이와 거의 흡사하다.
그 '전형적'인 배치가 무엇을 말하는 거냐면,
1. 자료실의 공간은 입구에서 데스크로 이어지는 긴 통로를 기준으로 크게 왼편, 오른편으로 공간이 나뉜다.
2. 서가는 서가대로, 테이블은 테이블대로 모여있다.
3. 모여있는 서가와 테이블 무리는 섞이지 않는다.
(입구에서 들어가는 통로를 기준으로 한편에는 서가, 한편에는 테이블 식으로 구획이 정확히 나뉜다는 의미)
이 전형적인 배치의 강점
1. 무난 & 단순하다. 그래서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
도서관마다 보유장서의 종류, 이용자의 특성이 조금씩 다르지만,
공공도서관은 동일한 장서 분류 방법인 'KDC한국십진분류표'를 사용한다.
기본적으로 장서의 분류 체계와 정렬 규칙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전형적인 배치는 어느 도서관에나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해진다.
새로운 도서관을 개관하거나, 새로운 자료실을 만들려고 해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무난하게 가면 기본은 가니까.
2. 관리가 편하지 않을까?
책은 책끼리 모여 있고, 테이블은 테이블끼리, 이용자는 이용자끼리 모여 있으니
아무래도 관리가 용이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도서관의 서가와 테이블이 복잡하게 섞여있다 치자.
사서가 책을 꽂으려면 책을 이마만큼 들고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 그 와중에 이용자들이 책을 읽으러 앉았다, 집에 가려고 일어났다 하면 책을 정리하는 사서와 부딪힐 가능성도 허다할 것 같다.
사서가 도서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데스크에서 확인하려고 해도, 높은 서가에 테이블이 가려져 있으니 하나도 보이지 않겠지?
관리 면에서 분명 강점이 있는 배치라고 생각한다.
서가, 테이블끼리는 적절히 모여있고 각각은 적절히 분리될 필요가 있긴 하다.
but, 전형적인 배치의 단점
1. 이용자들의 동선이 겹친다. 한 곳으로 몰림.
읽고 싶은 책이 있는 이용자가 도서관에 온 경우,
1) 일단 읽고 싶은 책이 있는 자료실에 들어간다.
2) 찾는 책이 꽂힌 서가의 위치를 확인한다.
서가별로 어떤 책이 꽂혀있는지 정보는 서가의 책이 꽂혀있지 않은 벽면에 붙어 있다. (ex. 808.9ㅇ ~ 808.9ㅈ)
찾는 책의 서가 위치를 확인하려면 하늘색으로 표시된 통로로 들어가서 대강의 서가 위치를 훑어봐야 한다.
(ex. 808번대는 이 정도 위치에 있고, 810번대는 그 근처에 있겠구나)
3) 찾는 책의 청구기호가 적힌 서가를 찾았다면, 서가 안쪽(서가와 서가 사이)으로 들어가서 책을 찾는다.
4) 찾은 책을 가지고 자리로 간다.
대략 이런 동선을 거치는데,
문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2)의 과정 때문에 대부분의 이용자들의 동선이 하늘색 통로에서 겹치게 된다.
서가 위치를 찾기 위해서 거칠 수 있는 더 나은 선택지가 없다.
이게 왜 문제냐고?
1) 이용자가 몰린 시간대에, 선택할 수 있는 동선이 한 가지밖에 없다면, 그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많은 과장을 보태자면 지하철 출퇴근시간대에 지하철 옆칸으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한 원리랑 비슷하다.
2) 동일배치가 어린이 자료실에 적용되면, 안전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책 읽으러 오느라 신난 아가들은 어느 정도는 뛰댕길 수밖에 없는데,
신난 아가들이 모두 한 통로로 다니면서 뛰어다닌다면
어린이 자료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 아가들끼리 서로 부딪힐까 봐 걱정될 때가 많다.
동선의 선택지가 여러 가지면, 사람들이 분산될 거고
효율성도 제고되고 안전도도 조금은 높일 수 있다.
2. 도서관에 오래 머무르면서, 책을 구경하고, 읽고 싶은 이용자들을 위한 배치가 아니다.
앞선 1)의 동선 문제는 이미 읽고 싶은 책을 정해 온 이용자의 경우인데,
이들의 경우 읽고 싶은 책을 찾으면 그 책을 대출해서 바로 귀가하거나, 찾은 책만 읽고 바로 귀가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읽고 싶은 책을 정해오지 않은 이용자는 어떡하지?
도서관에서 오래 머무르면서 책을 구경하고, 읽고 싶은 이용자는 어떡할까?
전형적인 도서관 배치에서는
'테이블에 앉아서 도서관을 둘러본다' 혹은 '서가를 구석구석 돌아보지 않고도 어떤 책이 있는지 구경한다'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아니, 그게 뭐 어때서?
1) 필요한 책 대출해서 집에 가서 읽으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할 수도 있고,
2) 원래 다 그런 거 아닌가?
라고 할 수도 있는 거 아는데,
반문하자면
1) 필요한 책 대출해서 집에 가서 읽으면 되는 거 아닌가?
도서관은 대출 기능만 있는 곳이 아니다.
물론 시민들이 대출만 하고 집에 가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공도서관은 공공 건축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공공 공간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머무르면서 시간을 보내고 휴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서는 안된다.
공공 공간이라면 마땅히 머무를 수 있는 공간, 열린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실제로 이용하고 안 하고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2) 원래 다 그런 거 아닌가?
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다.
동선이 겹치는 문제, 자리에 앉아서 책 구경을 조금도 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흥미로운 대안 혹은 가능성을 보여준 도서관 몇 군데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몇몇 도서관의 흥미로운 대안들
직접 경험한 공간만 소개. 순서는 단순 > 복잡한 대안 순으로.
1.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 테이블의 방향과 서가의 각도를 달리 한 경우
기본적인 공간 구획이 입구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서가, 오른편에는 테이블로 구분되는 것은 전형적 배치를 따르지만,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는
1) 모든 서가 앞에는 꼭 테이블이 있다.
2) 테이블의 방향을 제각기 다르게 한다.
3) 서가의 각도를 다르게 한다.
는 세 가지 방법을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유 설명은 그림으로 대체
2. Libary@Orchard (싱가포르의 공공도서관)
- 곡선형 서가를 도입, 서가 벽면에 장서의 종류를 명시한 경우
Library@Orchard는 쇼핑몰 내에 위치한 공공도서관으로,
공간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자료실 내에서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의 비중이 매우 적다.
이런 공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 도서관은
‘앉을 자리가 충분하지 않다면,
그 대신에 서가 사이를 다니면서 책을 구경하고 찾을 수 있는 정말 멋진 방식을 보여줄게’
라고 한다.
핵심은 바로 곡선형 서가.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서가 사이를 걸으면서 책을 둘러보기에 정말정말 좋다.
이유 설명은 그림과 사진으로 대체.
공간이 좁으니까 곡선형 서가를 도입해서 굳이 이동을 하지 않아도 한 자리에서 멀리 꽂혀 있는 책까지 다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정말 탁월하다.
공간적 제약을 이렇게 극복하다니, 이거는 활용까지 했다고 봐야 한다. 앞구르기하면서 대강 봐도 개성 있고 아름다운 도서관이다.
3. 싱가포르 센트럴 공공도서관
- 서가와 테이블 구획의 경계를 허문 경우
매우 유연하게 서가와 테이블을 배치했다.
서가와 테이블의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
서가는 일반적인 서가, 곡선형 서가, 원형 서가, 기둥 서가, 벽면 서가, 슬라이딩 서가가 있었고,
서가에 테이블이 연결된 형태도 있었다.
테이블도 일반적인 테이블, 소파, 1인 의자 등 다양했다.
공공도서관하면 떠오르는 딱딱한 분위기와 거리가 아주 멀다.
밝고, 편안하고, 근사한 공간이다.
센트럴 도서관의 유기적인 서가와 테이블 구성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도서관 안에서 남녀노소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빌려서 집으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앉아서 독서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게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4. 무지개도서관 (성남시 소재 시립도서관)
- 테이블을 정가운데에 배치한 경우
서가를 벽면에 가까이 배치하고,
테이블을 도서관의 정중앙에 배치했다.
1인용 소파도 가급적 열린 공간(정중앙)에 가까이 배치했다.
테이블이 정중앙에 위치하면 이용자의 동선은 사방으로 열린다.
무지개도서관은 일반 시립도서관과 달리 유아, 어린이 특화 도서관이라 어린이 이용자들이 주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불편해 보이거나 불안한 적이 거의 없다.
나의 최애 도서관. 아끼는 공간이다.
도서관 생각하니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손잡고 동네 도서관에서 책 읽던 기억이 갑자기 난다.
매번 도서관이 문 닫을 때까지 책을 읽었던 건지, 이제 그만 나가라고 안내 방송할 때 나오던 배경음악이 아직도 귀를 맴돈다.
소중한 기억이다.
공공의 공간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공건축의 중요성,
이 가치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도서관은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애정하는 공간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비가 오면 도서관에 들어가서 쉬었다 갈까? 했으면 좋겠고,
아가들이 부모님과의 추억을 쌓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고,
가출하고 갈 데가 없는 청소년은 도서관에라도 들어와서 엎드려 자다 갔으면 좋겠다.
책을 읽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많은 걸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 그 이상으로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
공공도서관이 그럴 여력이 아주 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