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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샘 Dec 16. 2020

삶과 서랍

죽음은 허락 없이 서랍을 열어젖히는 것과 같다.


지금 당장 당신의 서랍을 열면 그 속은 어떤가? 연필, 볼펜, 포스트잇 등 여러 가지 문구용품들이 마구 뒤섞여 있고, 클립이나 각종 검사용 도장, 동전 등이 굴러다닌다. 내 딴에는 정리를 한다고 하는데 조금 지나면 어느새 뒤죽박죽 되고 만다. 만약 누가 내 서랍을 갑자기 열어본다면 창피함 때문에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나의 허락 없이 누구도 내 서랍을 열어 볼 수 없다.


죽음은 함부로 열리는 서랍이다. 잘 정돈된 서랍이든 뒤죽박죽 정신없는 서랍이든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서랍이 열리고 그 속의 물건들이 함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만다. 그 사람의 물건들은 물론이고 다양한 인관관계들과 비밀스러운 것들까지.


남편이 병가를 내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잠깐 외출해서 함께 학교를 갔다. 교감님과 행정실장님께 여러 가지 부탁의 말을 한다. 벌여놓고 진행 중인 사업들의 방향을 지시하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 처리를 위해 결재권을 위임하였다. 미안하다고, 곧 회복하고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잘 부탁한다고 말한다. 회복하고 돌아와 반갑게 만나자고 악수를 한다. 그리고는 교장실 물건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작은 상자에 우선 필요한 물건들만 담는다. 나는 교장실 가운데 서서 말없이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성격대로 얼마나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지 그 짧은 순간에도 알겠다. 아마 서랍도 칸칸이 크고 작은 바구니를 넣고 종류별로 정돈되어 있을 것이다. 안 봐도 알 수 있다.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잊어버리는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며칠 뒤, 교장실에 있던 남편의 물건이 몇 개의 박스에 담겨 집으로 배달되었다. 아마 내가 직접 그 일을 할 정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학교에서 잘 정리해서 보내주신 것이다. 물건의 종류에 따라 구분되어 담겨 왔다. 커피를 좋아했던 사람, 교장실에 찾아오는 모든 분들께 직접 원두를 내려 대접하느라 사다 놓은 온갖 종류의 커피 관련 물건들이 담긴 박스, 많은 책들과 해마다 모아놓은 교육수첩들과 클리어 파일들, 컴퓨터에 깔려있던 모든 파일을 담은 외장하드 등이 담긴 박스들, 여러 행사 때마다 환하게 웃으면 찍혀있는 사진들이 담긴 박스, 목적에 따라 갈아입었을 옷장 속의 옷들.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서랍도 칸칸이 열리고 물건들이 꺼내졌겠지. 그렇게 죽음은 나의 서랍이 다른 사람에 의해 강제적으로 열리는 것이다. 나도 많은 뒷일을 처리하며 수없이 남편의 서랍을 열어보아야만 했다.


물건뿐이 아니다. 그가 살아오면서 맺어온 관계들, 소중히 여기며 살았던 것들과도 만나게 된다. 교장실 문에 학교 아이들이 붙여놓은 빼곡한 포스트잇을 찍어 위로의 말과 함께 보내준 선생님이 계셨다. 말로는 들었지만 얼굴은 뵌 적 없는 선배님이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언제든지 힘들면 연락하라고, 남편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아 빚진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전해온다. 간간이 불러내어 안부를 묻고 맛있는 음식을 사 주시며 나를 염려해 주는 선배님이 계시다. 너무 일찍, 너무나 갑작스럽게 떠나보내야 했기에 견딜 수 없이 아프지만, 잘 정돈된 그의 서랍처럼, 그는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에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마음과 정성을 다한 사람이다. 그의 삶의 서랍을 열고 들여다봐도 그는 참 정리정돈이 잘된, 누구에게나 따뜻했던 사람이었다.


요즘 나는 정리정돈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필요 없는 물건들은 치운다. 인간관계들도 마찬가지다. 불편하고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들은 만나지 않는다. 대신 내게 소중하고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삶은 서랍과 같은 것이므로, 잘 정돈된 서랍처럼 언제 타인에 손에 의해 열릴지 모르는 내 서랍들, 관계들을 정리해야만 한다.


책상 서랍을 열고 들여다본다. 우선 물건이 많이 없다. 작은 바구니를 배치하여 종류별로 물건을 담아두었다. 오래되어 쓰지 않는 필기류는 모두 버리고 자주 사용하는 몇 개만 두었다. 흐트러진 물건은 가지런히 정리한다. 


내 서랍처럼, 내 삶도 이렇게 정리하며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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