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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샘 Dec 16. 2020

낯선 아저씨의 뒷모습만 봐도

전에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바쁘게 걷는 사람이 남편인 줄 알고, 여보 하고 부를 뻔했다. 너무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고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길 위에 한참을 서 있었다. 


부쩍 쌀쌀해진 공기를 느끼며 여유 있게 출발했다. 요즘 조금 일찍 집을 나서서 아파트 단지를 빙 돌아 느긋하게 걷는 출근길이 참 좋다. 모두가 바쁜 걸음으로 서둘러 걷는 중에 천천히 여유 있게 떨어진 낙엽도 일부러 밟으며 걷는다. 가까이 이사를 하니 여유가 생긱고 산책을 하듯 천천히 걷는 출근길을 즐겨볼 생각이었다. 그때, 옆 동 현관에서 불쑥 아저씨가 튀어나왔다. 같은 방향으로 내내 걸어야 했기에 예정에도 없던, 모르는 아저씨와의 뒤를 따라 걷게 되었다.


좀 작은 듯한 키에 목까지 감싼 검은색 패딩을 입고는 목을 잔뜩 움츠리고 걷는다. 세월이 느껴지는 서류가방과 반짝반짝 닦인 구두는 그냥 일상적이다. 다른 한 손에는 급하게 막 묶은 투명한 비닐봉지가 눈에 띈다. 가만히 보니 적당한 크기로 자른 깎은 사과가 들어있다. 출근하는 남편의 손에 들려주며 "가면서 먹어요."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평온한 일상의 하루를 시작했겠구나 싶다. 앞서 걷는 아저씨의 희끗희끗해지는 머리카락을 보는데 이젠 버릇처럼 또 코끝이 시큰해진다.


저렇게 짧게 자른 남편의 뒷머리카락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어쩜 그렇게 머리카락이 뻣뻣한지 마치 고슴도치의 털 같다며 놀려먹곤 했다. 일찍 새치가 생기더니 흰머리가 많아져서 염색을 좀 하라고 권했지만 그냥 생긴 대로 산다면서 내버려 두었다. 점점 회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멋스러웠다. 공짜인데 무슨 말이든 못 해주랴? 영화배우 박상원을 닮았다며, 그 보다 더 잘생겼다고 하면 쑥스러워하면서도 좋아라 웃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멋있어 가던 사람, 그래 그랬다.


첫인상은 좀 무서운 편이다. 눈매가 날카롭고 목소리도 허스키해서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인상이다. 잘 모르고 스친 사람은 꽤나 엄격하고 날카로운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래 알고 지나다 보면 겉모습과는 달리 감성적이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 번 맺어진 인연을 오래 갖고 가는 사람이라, 형님, 아우 하는 사람들이 많고 남모르게 베푼 잔잔한 정이 많아 주변에 늘 사람이 모여들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제는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요즘 부쩍 남편 생각이 자주 난다. 낯선 아저씨 뒷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남편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가락의 감각을 떠올린다. 아저씨가 보이지 않은 지 한참인데도 혼자 눈물을 참아내며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걷는다.


내가 만약 사과를 깎아서 손에 들고 가라면 그 큰 눈으로 말했을 거다. 진심이야? 이걸?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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