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였다.
전 직원 워크숍이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장소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날짜만 다이어리에 표시해 두었다. 그날은 내가 1년간 팀장으로 꾸려온 연구팀 마지막 대면심사와 겹쳤다. 다른 사람들은 버스 한 대로 먼저 출발했고, 우리 연구팀은 대면심사를 마치자 마차 승용차 한 대로 늦게 출발하였다. 심사를 모두 끝내 놓고 가는 길이라 시끌벅적 떠들며 가느라 차량이 익숙한 도로에 들어서서야 아, 우리가 가는 곳이 낙산사였구나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낙산사.... 양양 바닷가....
우리는 해마다 양양으로 해돋이를 보러 다녔다. 아이들 어렸을 때부터 쭉. 새벽에 고속도로를 달려 양양에 도착하면 숙소를 정하고, 바닷가로 달려 나갔다. 겨울이지만 찬 바닷바람이 좋았다. 동해 바다의 검푸른 파도와 장난치기도 하고, 새해 소망을 나누고 불꽃놀이를 하며 바닷가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졸리고 지칠 때쯤,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양양 부녀회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보이는 떡국 잔치이다. 천막을 여러 대 설치하고 가스 불 위 펄펄 끓는 솥이 여러 개다. 폭 삶아져 구수한 육수에 하얀 떡이 들어간다. 겉절이 김치에 떡국을 인심 좋게 나눠준다. 떡국을 퍼 주는 손길도 새벽 추위에 떨던 관광객들도 모두 그 한 그릇에 웃음이 가득 담긴다. 우리 아이들은 유난히 그 떡국이 맛있다고 몇 번을 받아다 먹는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이 웅성거림이 시작되고 하늘 한 구석이 붉어지며 바다를 뚫고 해가 솟기 시작한다. 무슨 의식처럼 우리는 팔을 벌려 꼭 안고 얼굴을 맞대고는 붉다 못해 빨아간 일출을 보며 그 해 소원을 빌곤 했었다.
해돋이를 마치면 낙산사를 한 바퀴 돌고, 홍련암까지 다녀오고 서둘러 차 밀리기 전에 서울로 출발했다.
어느 해 뉴스에서 낙산사가 불타는 장면이 생중계되던 때, 우리 아이들은 뉴스를 보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열심히 해돋이를 보러 양양으로 가곤 했었다. 그 모든 추억은 남편이 우리에게 만들어준 추억을 한 장면이다. 꼼지락거리기 싫어하는 나는 늘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쪽이었고, 막상 도착하면 우리 아이들보다 더 좋아라 깡총거리며 좋아했었다. 이런 내 모습을 항상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람이었다.
아무 생각 없다가 차가 낙산사를 향하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가슴 밑바닥부터 꺽꺽 울음이 올라온다. 진정해야 한다, 이 분위기를 망치면 안 된다, 어색하게 만들지 말자 속으로 억누르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우리 후발대가 도착했을 때 일행들은 식사 중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음식이 들어가기도 전에 벌주 겸 축하주 겸 술을 몇 잔 받아마셨다. 한 바퀴 쭉 돌면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회와 매운탕에 식사를 마치고 나니 거나하게 취기가 올랐다. 바쁜 일도 마무리가 되었고, 또 바닷가에 와서 직원들이 다 함께 어우러지는 자리이니, 분위기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추억에 취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불꽃놀이를 하며 맨발로 바닷물에 발을 적시는 사람들,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하는 사람들, 우리 일행밖에 없는 듯 한가한 겨울 바다를 원 없이 즐겼다. 나는 한 구석에 앉아 몇몇과 진한 소주만 들이켰다.
이튿날, 낙산사를 한 바퀴 돌았다. 말없이 그냥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홍련암도 한 바퀴 돌고. 고즈넉한 선교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한방차도 한잔 마시고, 잘생긴 적송들을 올려다보며 아, 좋구나 하던 남편의 목소리도 들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장소를 다시 찾는 것은 여전히 너무 아팠다. 올라오면서는 지난밤의 과음으로 내내 잠만 잤다.
집에 도착하니 딸 방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히 디밀고는 말했다.
"수진아, 엄마 낙산사 다녀왔어."
우리 딸 무심히 한마디 던진다.
“낙산사? 우리 낙산사 잘 있지?”
“응.”
그럼, 우리 말고는 세상은 모두 잘 있어. 이제 우리만 잘 지내면 되는 거야. 속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