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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샘 Dec 21. 2020

세리머니를 할 성적은 아니잖니?

이런저런 컨셉으로 참 잘도 논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몰려다니는 소위 6 공주 파다. 어려서는 집집으로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더니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얼굴을 보기는 힘들다. 어디 아파트 놀이터, PC방, 노래방, 백화점, 영화관 등을 쏘다니는 것 같았다. 제각각 다른 전공으로 대학을 가더니 아예 상반기, 하반기 생일잔치를 한다며 공식적인 외박을 통보하고는, 홍대나 강남 근처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정하고 밤새 논다. 취업을 하더니 이제는 돈 좀 만진다고 호캉스를 하면서 요란 시끌벅적하게 몰려다니며 논다.


이번 하반기 생일잔치 컨셉은 한옥 체험이란다. 고즈넉한 한옥을 예약하고, 개량한복을 주문해서 단체로 입고, 맥주 대신 막걸리를 마시고, 아침 일찍 경복궁 산책을 하는 일정인가보다. 준비하면서 전화로 까르르 까르르 즐거운 대화가 계속된다. 한옥 체험, 고궁 산책 재미있겠다. 지난여름, 애니멀 컨셉이라며 우리딸은 여왕벌 머리띠에 여왕벌 무늬 옷을 사 입고 다른 친구들은 기린, 사자, 고양이 등으로 동물로 변신해서 돌아다니더니 그것보다는 좀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생각만으로도 덩달아 즐거워 미소가 지어진다.


중학교 때 일이다.

며칠 계속된 중간고사가 끝나고 일찌감치 집에 있어야 할 아이가 집에 없다. 친구들하고 노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깜깜해지도록 들어오지 않는다. 기다리다가 친구들 집에 연락을 해 봤는데도 그날은 아무도 함께 있지 않다. 갑자기 안 좋은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완전히 지배되고 만다. 나도 모르게 나쁜 생각을 마구 하게 된다.  

'아니, 이 시간까지 집에 안 오는 거지?'

'시험을 망치고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조금만 더 늦어지면 경찰에라도 연락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풍선처럼 부풀었을 때, 딸아이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야, 너 지금 몇 신데 이제 들어와? 어디 갔었던 거야? 연락도 없이. 미친 거 아니야?"

쏟아지는 나의 질문 세례에 조금 당황한 듯이 대답한다.

"아니, 도대체 왜 그래? 나 CGV 가서 영화 한 편 보고 왔는데, 무슨 일이에요?"


영화를 보고 왔단다. 부풀대로 부풀어 터져 버린 풍선처럼 걱정이 한순간 사라지며, 마음이 진정되고 나니 궁금해졌다.

"네 친구들 다들 집에 있던데, 누구랑 영화를 보러 갔다는 거야?"

"오늘은 시험이 끝났잖아. 그래서 나만의 세리머니를 해야지. 나 원래 시험 끝나면 항상 혼자서 영화 한편씩 보고 왔었어. 엄마한테 말은 안 했지만."

"그래? 그런데 이렇게 늦은 적은 없었잖아?"

"응. 항상 시험 끝나면 내가 앉아서 보는 자리가 있는데, 오늘은 그 자리 표가 팔리고 없더라고. 그래서 다음 상영 기다렸다가 그 자리에 앉아서 영화 딱, 보고 왔지."


아이코, 세상에나! 시험 끝낸 기념으로 항상 영화를 한 편씩 봤었고, 오늘은 자신만의 그 지정석이 날 때를 기다렸다가 보고 오느라고 늦었다는 설명이다. 어디서 이런 깜찍한 생각을 했을까? 나 어릴 때는 생각도 못했고,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멋진 세리머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이쁜 딸을 내가 낳았다니! 고집스러운 자기만의 생각이 분명하고, 정도를 벗어나지 않으며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요런 요런 사랑스러운 내 딸!


"그런데 말이야, 니 성적이 어디 가서 세리머니를 할 성적은 아니잖니?"

이 말을 날려놓고 순간 당황해하는 딸을 보고 푸하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치, 엄마, 그러는 거 아니에요. 성적이 뭐가 중요해요. 열심히 했고, 시험은 끝났고. 그게 중요한 거지!"


맞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 다독이고 격려하며, 소소한 재미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지금도 맘에 맞는 친구들과 그렇게 소소한 이벤트를 만들고 재미있게 놀면서 인생을 맘껏 즐기렴. 열심히는 살되 그 결과에 상처 받지 말고,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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