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종일 선배님들이 놀려대서 혼났다 야.”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말한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는 학교에서 방송 및 행사 사진 담당 업무도 맡고 있었다. 젊은 신규교사들은 의례 온갖 업무를 맡아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총각 선생님이야 오죽했을까? 학교 행사가 있으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 정리해야 했고, 동영상을 촬영해서 테이프에 라벨을 붙여 정리하는 업무였다. 그가 정리한 사진 자료를 교무실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함께 보다가, 교생 실습 기간에 찍힌 사진들이 온통 내 얼굴밖에 없었다고 한바탕 웃고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우리의 연애사를 대충 알고 있던 선생님들은 신이 나서 놀려먹느라고 붉은 얼굴들을 들이밀며 와글와글 신이 났단다.
“야, 이건 너무하지 않냐? 온통 다 류 선생 얼굴이네.”
“학교 행사 사진 찍으라고 했더니, 이건 좋아하는 사람 얼굴만 죄다 찍어놨네. 으흐흐흐”
“이거 안 되겠는데. 이봐 안 선생, 너 정말 이러기냐?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누구만 쫓아다닌 거야?”
“학교 기록물이 아니고, 연애 기록물이로구먼! 그냥은 못 넘어갈 일이다. 응? 알지?”
교생 실습 나온 여대생과 그 학교 총각 교사와의 연애는 낄낄거리며 나누기 좋은 이야깃거리로 충분했다. 그 시절, 그 선배님들과는 30여 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연결이 되어 가끔 만나곤 한다. 그는 선배님들께 데이트 비용도 많이 얻어 썼다고 한다. 나는 그때, 교사들은 학교 수업만 마치면 모두 집으로 퇴근하는 줄 알았다. 그는 언제나 아무 때나 대학교 교문 앞이나 집 앞에서 나를 늘 기다리곤 했다. 그 선배님들이 모두 눈감아 주시고 뒤에서 적극 밀어주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늘 생각했다. 세상에 그렇게 자상한 사람이 또 있을까? 저렇게 모든 열정을 담아서 내게 집중해 주는 사람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세상에 우리 아버지보다 더 자상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그런데 그는 나를 까르르 웃게 하고, 세상을 다 가진 부자로 느끼게 하고, 이 사람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행복이라 말하게 했다.
졸업을 하자마자 친구들보다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가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 그가 계모 손에서 자라면서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린 떨어져서 지낼 수 없었다. 뜨거웠고 간질간질했고, 벅찼던 한 그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그를 처음부터 참 좋아했다. 집을 떠나 생활하는 딸아이를 듬직한 사위에게 넘겨주는 것을 행복해하셨다. 이런저런 조건으로 상처 주는 그 어떤 과정도 없이 우리는 작은 신혼집을 마련하고,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가 그렇게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흘릴 줄은 상상도 못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