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끝 현관 신발장 앞에서 다들 분주하다. 익숙하지도 않은 정장구두를 신고 깔끔한 양복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낯설다. 학교에서 늘 보아오던 모습과 너무도 다르다. 교생실습을 위해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정장을 입은 까닭이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나의 모습도 꽤나 어색했을 것이다.
모두들 긴장이 풀린 듯한 편안한 몸짓과 표정들 속에서 약속 장소를 확인하는 가벼운 대화들이 오고 간다.
“어디라고 했냐? 학교 앞으로 쭉 나가서 시장 통 골목에 있다고 했지?”
“응. 멀지 않더라고. 얼른 가자. 한잔 해야지.”
그 무리들과 조금 떨어져 느리게 구두를 갈아 신으면서도 초대받지 못한 나는 기분이 좋지 않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텐데 왜였을까? 평소 같으면 새초롬하게 지나쳤을 그 순간을 혼잣말로 뱉어버렸으니.
"치, 뭐야? 남자 교생들만 오늘 모이는 거야? 치, 치사하네."
그 말을 주워 삼키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따라온다.
“같이 갑시다. 우리 남자 교생들만 모이라고 한 것 아니에요. 같이 가요.”
이건 뭐람? 얼굴을 보지 않았어도 그가 누군지 알겠다.
그는 내가 교생으로 배정받은 옆 교실 선생님이다. 우리 담당 선생님과는 많이 친한가 보다. 시도 때도 없이 우리 교실을 드나든다. 껄껄거리며 그가 우리 반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교생인 나와 슬쩍슬쩍 눈길이 스쳤다. 유난히 허벅지가 굵다. 쌍꺼풀이 없는 커다란 눈에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키가 큰 그는 목소리가 크고 웃음이 시원하다.
체육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뭔가 말을 전달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보기에도 어설펐던 여자 교생의 말을 따를 리 없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이들이 난리다.
“여러분, 잠깐만요. 이리 모여주세요.”
나의 목소리는 넓은 운동장에 흩어져버린다. 울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그때, 그가 나타나서는 호루라기를 휙 한번 불었다. 거짓말처럼 아이들이 모였고, 거짓말처럼 4열 종대로 딱 맞춰 선다. 이놈들 좀 보소.
“얘들아, 선생님이 모이라고 하시잖아. 똑바로 서라. 응? 선생님 말씀 잘 듣어!”
와, 낮은 목소리인데도 절도가 넘친다. 그렇게 아이들을 집합시켜 주고는 운동장 저편 자기 반으로 씩씩하게 걸어간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혼자 해본 소리예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우린 류 선생님 완전 환영이지요.”
그렇게 그에게 이끌려 나는 그곳에 가고 말았다.
대학교 3학년 교생 실습 첫 주, 수업을 마치고 남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생들과 한잔 하는 눈치다. 그런데 남자들만 쉬쉬거리며 일정이 잡혀간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여자 교생들은 제외되는 눈치다. 가자고 초대했어도 안 가겠다고 했을 가능성이 많았을 게다. 그 자리에 제 발로 찾아들어간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허름한 선술집 같은 일명 방석집에 들어섰다. 처음이다. 막걸리에 파전, 아니면 라면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던 가난한 대학생으로서는 제법 고급스럽기까지 하다. 낮은 천장에 시골집 같은 꽃무늬 벽지를 발랐다. 바닥에 낡은 방석이 하나씩 깔려있고 긴 상 위로 온갖 종류의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시커먼 남자들만 이십여 명 앉았는데, 그날따라 단정한 복장을 한 나 혼자 홍일점으로 앉게 있게 된 상황을 어찌할거나. 에라 모르겠다.
나의 등장에 거기 있던 남교사들과 남자 교생들은 모두 적잖이 놀란 눈치다.
“제가 가시는 것을 함께 가자고 모시고 왔습니다. 다들 좋으시지요?”
그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연세 지긋한 선생님께서 잔을 주셨다. 홍일점이라 내게 잔이 왔겠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첫 잔은 원샷이다. 얼른 마시고 잔을 되돌려 드리려니, 규칙이 다음 잔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거란다. 나는 옆에 앉는 그에게 제법 호기롭게 잔을 넘기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외쳤다.
그건 사고였다.
그 밤에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모르겠다.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고,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챙겨야 했다. 그리고 그 밤에 우리는 사고를 쳤다. 그렇게 우리는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