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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샘 Jan 08. 2021

타인의 슬픔을 대하는 자세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2P


대학원 과정에서 한 학기 <애도>에 관한 수업을 들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겪을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애도 과정, 그런 사람을 돕는 방법 등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이 배움을 통해 나중에 이런 슬픔을 겪는 사람을 돕거나 이해하고, 기회가 되면 봉사활동을 해도 좋겠다 생각했었다. 그건 모두 다른 사람의 일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나는 사별을 오롯이 겪어내야 했다. 그러는 중에 내가 애도 과정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하고 절망하고 수용하는 애도 과정을 나도 겪으면서 대학원 강의 중에 내가 배운 <애도>가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애도 과정 중 글쓰기는 치유의 좋은 방법이라고 배웠었다. 나도 글쓰기를 통해 내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냈고 내 감정을 억눌러 밀어 넣지 않고 그대로 끌어올려 글로 써 내려가는 과정을 통해 많은 치유의 경험을 했다. 어쩌면 슬픔 중 그 어느 것보다 작지 않은 사별을 겪으면서 나는 어쩌면 나와 같은 슬픔을 겪는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니까.


그 과정에서 내 곁에 있던 좋은 사람들은 그때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거나, 괜찮냐고, 힘내라고 어설픈 위로의 말을 건넸다면 고맙다고,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그들과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지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공적인 업무 이외의 개인적인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나를 진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내가 조금씩 웃기 시작하고 그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고, 나는 요즘 이래~~ 하고 내 이야기를 할 때까지.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그건 쉽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의 슬픔을 대할 때 어떤 자세가 필요한지, 공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내가 위로하거나 다가가고 싶은 순간이 아니라 상대가 준비된 시간이 언제인지 살펴야 한다. 아주 조심스럽게 상대의 슬픔을 조심스레 따라가야만 한다. 상대의 슬픔에 한마디 위로의 말을 하고 싶겠지만 그건 좋은 태도가 아니다.

나는 요즘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쉽게 '힘들지? 괜찮니? 괜찮아질 거야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가만히 다가가 손을 잡아주거나 말없이 어깨를 감싸고 안아준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그저 한 걸음 떨어져서 가만히 바라본다. 그의 낯빛과 그의 시선을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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