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를 한 대 뽑겠어요.!"
오래 생각해 두었던 말은 아니었는데 선언하듯 큰 소리로 말해놓고 방으로 들어오고 나니, 정말 차를 한 때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한지 오래되었고, 아들아이 생일에도 일이 있다며 함께 하지 못한 며칠 뒤, 우리는 그야말로 대판 싸웠다. 뭐가 중요한 것이냐? 가정이 중요하지 승진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계속 지낼 거냐는 말들이 걸러지지 않고 마구 쏟아져 나왔다.
"날 이해해 줘야지. 내가 나 좋자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당신이 좀 이해해 줘라. 응?"
"가족을 위해서 승진하는 거라고 말하지 말아요. 나 정말 당신 이렇게 밖으로만 도는 거 싫어요.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아빠 승진한다고 이렇고 다니는 거 정말 싫다구요.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원해서 이러는 거니까 가족 핑계 대지 말아요."
"당신 정말 이럴 거야?"
"내 차를 한 대 뽑아야겠어요. 애들 데리고도 좀 다녀야 하고, 마트도 혼자 다닐 거예요."
두 돌 무렵의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와 기르는 동안 어른들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옆에서 자상하게 언제든 도와주던 남편은 내게 든든한 산과 같았다. 아이들이 아프면 함께 병원을 데려다주었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가도 항상 함께 가서 무거운 짐을 번쩍 들어주던 사람이었기에 더욱더 남편의 부재가 힘이 들었었다.
승진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장학사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남편이 바빠졌다. 공부도 해야 하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잦아졌다. 부부교사로서 같은 시간 패턴으로 늘 붙어 다니며 생활하던 나는, 남편의 승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음으로는 뜯어말리고 싶었다. 남편은 가족을 위해, 가족에게 더 큰 울타리가 되어 주기 위해 승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족들이 함께 있는 추억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생각이 달랐다.
장학사 시험공부는 만만하지 않았다. 시험공부를 위한 시간도 많이 필요해서 집 근처 독서실을 다녔다. 게다가 장학사 선발 과정에서 함께 근무하는 동료 교사들의 전화 인터뷰가 인성 점수로 채점되기에 학교 근무도 성실하게 잘해야 했다. 또한 이런저런 인맥들도 있어야 했기에 많은 사람들과의 술자리도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늘 취해 있거나 피곤해 젖은 종이상자처럼 집에 오면 구겨져 지내야 했다. 그런 생활을 몇 년을 하게 되니, 나도 불만이 점점 쌓여갔다.
그 당시에는 나는 진심이었다. 남편도 자기의 맘을 몰라주는 내가 정말 섭섭했을 것이다. 부부싸움 후 그는 한동안 입을 닫았었다.
남편이 장학사가 되고 나서는 더 바빠졌다. 몇 년을 주말에 여행 한 번을 제대로 못하고 지냈다. 나는 차를 한 대 샀고 남편으로부터 일정 부분 독립을 했다. 남편을 기다리지 않고 기동력이 생기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다. 우선 아이들을 픽업할 때 자유로웠다. 마트나 백화점도 아무 때나 나 가고 싶은 데 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 날 좋을 때 혼자 드라이브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도 자라면서 내 손이 덜 필요해졌고 남편에 대한 서운한 마음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바빠서 늘 지쳐있는 남편이 안쓰러운 마음이 생기면서 가정이 평온해졌다.
남편은 주말이면 내 차를 끌고 가서 깨끗이 세차를 하고 기름을 가득 넣어서 주차장에 세워 놓았다. 남편을 보내 놓고 처음으로 주유를 할 때 주유 버튼이 어디 있는지, 주유구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도 몰라 헤매다가 한바탕 눈물을 쏟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이 그때 승진하려고 집중할 시기였고 가정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던 남편이 이해가 된다.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빨리 교감 교장도 되고 나중에 교육감으로도 승진하여 울타리라도 든든하게 만들어줘야지 생각했던 것이다.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면서 다시 남편은 다정하고 따뜻한 가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내가 옳았다.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할까? 더 자주 맛있는 것을 해 먹고, 함께 더 좋은 곳을 여행 다니고, 함께 더 붙어 지냈어야 했다. 시간이 너무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