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어느 날, 울지 않기로 했다.

1막: 무너지지 않기 위해 견디던 시간들 (과거)

by ARI


어린 시절의 우리 집은, 늘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 평범한 풍경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였다.


우리집은 정말 화목한 집안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가정에 충실했고,

우리 남매는 언제나 사이가 좋았다.


아빠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제일 소중하다고 했다.

퇴근하면 집으로 곧장 와서 별명이 '땡칠이'라고 불렸다.

조금이라도 더 우리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다.


엄마도 다르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항상 시장을 들러,

늘 정성스러운 저녁을 차려주셨다.


우리 가족은 매일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냈다.

아빠의 농담은 우리를 언제나 웃게 했고,

엄마의 따스한 밥상 덕분에 집 안에는 늘 온기가 감돌았다.


가족은 나를 '칠푼이 팔푼이'라고 놀렸다.

늘 밝은 아이처럼 뛰어다니다가 넘어지기 일쑤였고,

많이 다치기도 했지만 그런 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손을 잡고 등교를 할 정도로

남동생과 나는 사이가 참 좋았다.

말수가 적었지만, 어딜가든 함께였다.


친구들은 행복한 나를 늘 부러워했다.

그래서 매일 학교를 마치고 집에 놀러오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엔,

옥상에 올라가 친구들과 물장난을 했다.

우리는 강아지들과 함께 실컷 뛰어놀았다.

그리곤 집으로 내려와 냉장고를 비우고,

집을 한껏 어질러댔다.


친구들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너네 엄마 진짜 요리 잘한다!"며 감탄했다.

아빠는 친구들 이름을 다 외우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내 부모님이 자랑스러웠다.


부모님은 항상 나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응원해주시고 지지해주셨다.

그리고, 정말 오래도록 그렇게만 살 줄 알았다.


아무 걱정도 두려움도 없던 시절.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것 같던 행복이,

서서히 조각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빠의 병이 시작되자

집 안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10살무렵,

아빠가 위암 3기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마쳤지만,

항암치료가 무척이나 힘든 과정이었다고 했다.


아빠의 병문안을 간 날이었다.

"으ㅡ악!"

복도에 울리는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그건 분명 아빠의 목소리였다.


잔뜩 겁을 먹는 나와 동생이 엄마를 올려다봤다.

엄마는 불안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얘기했다.

"우리같이 아빠 보러 갈거야, 그런데 아빠가 좀 많이 아파"


병실 안, 창백한 얼굴의 아빠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주렁주렁 링거를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괜찮아..?"


아빠가 우리를 보며 일어나 앉으며 얘기했다.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고 얘기하는 듯 들렸다.

"그럼, 아빠 많이 안아파. 괜찮아 "


아빠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속 무언가가 철렁 내려앉았다.

어쩔줄 몰라하는 동생과 엄마를 보며,

하고싶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왠지 그래야할것 같았다.


아빠가 치료가 끝나는 동안,

나와 동생은 한동안 이모 집에서 지냈다.

돌아올 엄마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낯선 집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 날 밤늦게 지친 얼굴로 돌아온 엄마는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의 안부를 묻는 이모 앞에서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을 문틈 사이로 지켜봤다.

그 순간,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꾹 참아야만 했다.

동생이 옆에서 엄마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고,

나는 오히려 동생을 달래주며 말했다.

"엄마 금방 올 거야."


그날 밤, 나는 한참을 이불 속에서 깨어 있었다.

마치 숨이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다.

울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소중한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슬퍼하는 엄마를 위해서,

아픈 아빠를 위해서,

어린 동생을 위해서.


나는 다시 밝은 아이처럼 보이기로 결심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건 그저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

하루가 조금 더 나아질거라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웃었으면 했다.

입맛 없던 날도 억지로 밥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더러 체하는 날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먹었다.

반찬 투정을 하지 않으면 엄마가 조금이라도 기쁠 것 같았다.


아빠는 늘 장난기 많고 잘 다치는 나를 걱정했다.

그런 아빠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뛰다가 넘어져 무릎이 다 까져도,

일부러 씩씩한 척 했다.

"나 괜찮아! 하나도 안아파!"


나도 어렸지만,

더 어린 동생을 좀 더 보듬어주고 지켜주고 싶었다.

내가 울면 안 되는 이유가, 동생 얼굴에 다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감정을 감추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건.


어리광을 부리고,

투정을 부리고,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렇게 하면 가족들이 조금 덜 힘들거라고 생각했다.

모두의 하루가 조금 더 괜찮아지기를 바랐다.

다들 각자 힘들거라고 생각했기에, 나보다도 가족을 더 챙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울음을 삼키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렇게, 견디며 살아가는 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