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4. 사라진 이름, 사라진 나

1막: 무너지지 않기 위해 견디던 시간들 (과거)

by ARI


학교에 제출할 서류를 준비하러

동사무소에 들렀던 날이었다.

등본을 뽑아 나오는 길에,

거기서 아빠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똑같았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숨이 턱 막혔다.

'엄마 아빠가 이혼했는데 나한테 알리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순간 종이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한참을 얼어붙어 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물어봐야 할지,

모른 척 해야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이혼을 한게 사실이라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까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는 아빠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앞을 가려왔다.


어쩌면 나는,

그 누구보다 가족들이 단절되지 않기를

바라왔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바람이 무너지는 걸 보며,

나는 결국,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게 되었다.

'내가 좀 더 동생을 챙겼어야 했나?

내가 좀 더 엄마,아빠를 살폈어야 했나?'


계속해서 생각이 꼬리를 물자,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날 저녁,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건… 채권추심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법적인 이혼일 뿐, 아빠랑 헤어진 건 아니야."

그 말을 고스란히 믿을 수 없었다.


법적으로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은,

'완전하지 않은 가족' 이라는 상처로 남았다.

그토록 가족이 흩어지지 않길 바랐지만,

결과는 내가 바라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가슴속이 뭔가 찢어지는 듯 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아빠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점점 더 두려워졌다.

언제 아빠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외롭게 했다.


하지만 엄마도, 동생도 그럴거란 생각에

보고싶은 마음을 마음속으로 꾹 눌러담았다.

그리고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내가 더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그저 입을 다물었다.


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아빠 이름이 사라진 등본이 머릿속에 아른거려서,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도 재밌어 하던 체육시간도 빠지게 되었다.

"제가 오늘은 몸이 좀 안좋아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을 뒤로 하고 양호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있으니,

진짜로 어디가 아픈 건지도 몰랐지만

그냥 모든 게 무거웠다. 몸도, 마음도, 하루도.

진통제를 먹고 한동안 누워있었지만, 머리는 갈수록 지끈거렸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자꾸만 눈물이 나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자는척 했다.


아무의미없는 학교생활이 점점 지겨워졌다.

몸이 아픈날이 늘어갔고, 조퇴일수도 더해졌다.


학원마저도 빠지는 날들이 늘어가자, 선생님이 내게 물어왔다.

"무슨일있어? 요즘 학원을 자주 빠지네"

아무일 없다고 답했다.

사실은 얘기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집안 상황을 얘기해도, 현실이 바뀌진 않을 것 같았다.

성적이 떨어지고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자,

학원마저도 그만뒀다.


어느 날,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왜 이런일들이 생기는거지?'

'왜 이렇게 힘들지?'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졌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조금씩 허탈감마저 생기고 있었다.


어릴 적 뛰놀던 강아지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집 안은 점점 조용해졌다.

무엇보다 무서웠던 건, 그런 분위기가 익숙해져간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점점 더 말을 줄였다.

감정을 표현하는 게 어리석게 느껴졌고,

말을 꺼낼수록 마음이 더 헝클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힘든 티를 낼 수 없었다.

엄마 혼자 나와 동생을 키우느라 지쳐 보였고,

나만 힘들다고 응석을 부릴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없이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했다.

손끝이 빨갛게 부르트도록 물을 만졌지만,

어쩐지 마음은 자꾸만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은 친한 친구가 말했다.

“너 요즘 좀 이상해.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말만 했다.

하지만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나만 알고 있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가족은 흩어졌고,

집에선 조용한 공기만 감돌았다.

그 속에서 나는 편히 쉬는법 조차 잊어갔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불안했다.

내가 뭔가를 해야 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방법이라곤,

그저 밝게 지내는 것,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통하지 않자 길을 잃은것 같았다.


하루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걷고 있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나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아빠가 너무 보고싶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얼굴은 눈물때문인지,

쏟아진 비때문인지 축축 했다.

온몸이 다 젖은채 집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아무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거였다.


하고싶은 말들을 삼키고,

감정들도 꾹 눌러 삼켰다.


그렇게 나는, 말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갔다.

말하는 법을 잊은 게 아니라,

말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는 걸 먼저 배운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