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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리미 Apr 25. 2024

10. 베이비 페어

상식 또는 이상적인 육아와 교육관

베이비 페어

   언제부턴가 주말이나 연휴는 물론 국경일같이 달력이 빨간색을 가리키는 날이거나 연, 월차를 쓰게 되더라도 이젠 우리 둘만을 위한 시간이 아니게 되었다. 쉬는 날이면 무조건 근교라도 놀러 나가거나 한강공원에 앉아 가볍게 맥주라도 한잔해야 했던 우리로써는 달라져야 했다. 아내의 배는 아랫배만 약간 볼록해 아직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제 우리 가족은 셋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임산부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우린 해마다 열리는 ‘유아교육 전’이나 ‘베이비 페어’ 같은 곳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 가진 부모 행세를 하고 싶은 것도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는 온라인보다는 현장에서 직접 보고 만져 보는 것이 출산에 필요한 물건이나 육아용품 정보도 얻기 수월해 보였다. 아직은 아이쇼핑 수준이긴 했지만 저렴한 것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도 할 생각으로 방문했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일찌감치 예약해 둔 덕에 입구에서 신분만 간단히 확인 후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 시 손목에 확인되었다는 표시로 종이 밴드를 채워주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넓었다. 사람들이 많아 이 넓은 공간이 협소해 보일 정도였지만 행사장은 규모만으로도 눈이 휘둥그레지기에 충분했다. 한 번쯤 꼭 가보라고 친구들이 권하기도 했고 시즌만 되면 곳곳에 홍보물들이 많아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많은 인파에 더욱 놀랐다. 육아용품 시장도 점차 규모가 방대해져 다양한 제품 군 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쉽사리 고르기 힘들 정도로 육아와 출산용품은 브랜드, 종류, 국가별, 성별에 따라 다양했고 업체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날카로웠다. 대규모로 진행되는 행사인데도 부스마다 인파가 몰려 지나가기 힘들 정도였고, 어떻게든 잠깐이라도 붙잡아 두기 위해 목소리 높여 호객행위에 열을 올리는 것은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을 반증했다. 그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틈틈이 샘플로 주는 속싸개나 거즈, 유아 면봉 같은 것들을 꼼꼼히 챙겼다.


   대부분의 행사가 그렇지만 여기도 부스별로 규모나 사람들이 몰리는 특정 브랜드들이 있다는 건 다른 행사들과 별반 차이는 없었다. 남자들에게도 많이 익숙하고 유명한 ‘아가방’이나 ‘피셔프라이스’, ‘더블하트’ 같은 대형 브랜드들은 넓고 좋은 자리를 차지해 동선이나 접근이 쉬워 사람들로 붐비지만 그렇지 못한 영세 업체들은 대체로 작은 부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벽면이나 구석에 위치해 사람들이 적어 비교적 한가했다. 그래도 대형 브랜드 못지않은 열기와 자신감은 충분해 보였다. 오히려 차별화에 중점을 두고 대형 브랜드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하고 아이디어 넘치는 제품들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여러 부스를 둘러보다 한눈에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부스가 눈에 띄었다. 꼬리 물듯 꼬불꼬불 줄지어 어떤 줄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를 정도로 붐볐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어디부터 시작되는 줄인 지도 모르다 보니 선뜻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멀찌감치 부스 높은 곳에 브랜드명들이 크게 붙어 있었고 주변 곳곳에 피켓과 현수막, 입간판들로 교육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친근한 글씨체로 유혹하듯 쓰여 있는 홍보 문구들이 내 눈을 의심하게 했다. 제목부터 ‘기적이 일어나는 0세 교육’, ‘천재 뇌를 만드는 교육 0세부터 시작하세요’, ‘0세 교육 시대에 맞는 육아 교육법’, ‘0세부터 시작하는 우리 아이 영재 만들기 비법’ …… 0세? 0세면 아직 배 속에 있을 나이 아닌가? 내 아이를 영재나 천재로 만들기를 원하는 건 대부분의 부모라면 꿈이면서도 그 희망이 이루어졌으면 한다는 건 익히 잘 알고 있고 공감한다. 하지만 그 시기가 0세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몬테소리’, ‘프뢰벨’, ‘아가월드’, ‘신기한 나라’, ‘빨간펜’ 등 나에게도 익숙한 교육 브랜드들이 한데 모여있고 온갖 교재와 영상, DVD 홍보물들도 넘쳐났다. 부모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줄지어 하나같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각오로 한 곳이라도 더 상담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우리나라 교육열은 전 세계에서도 알아준다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부터 한창 먹고 뛰어놀아야 할 나이까지 그저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상담받는 부모들의 표정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대부분 걱정 섞인 표정으로 시작하다 상담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이렇게만 하면 똑똑한 아이가 될 것만 같은지, 이내 표정은 환희로 바뀐다. 그리고 거침없이 지갑을 열고 두 손 바리바리 교재와 사은품을 한가득 챙겨가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그마저도 한두 달 치 교제가 아니라 커가면서 나이 대별 교제를 집으로 받아보는 형태로, 연간 교제 가짓수나 비용은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아 보였다. 아이들은 저 많은 교제를 왜 봐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부모 무릎에 앉아 보고 들어야 한다.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영재인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어떤 촉이 온 것일까? 이것이 정말 내 아이를 위해서일까? 오로지 부모의 욕심 때문만은 아닐까? 그렇지 않은 부모들이 훨씬 많겠지?’ 생각이 많아졌고 혼란스러웠다.



   “와! 0세부터 교육이라니… 얼마 전 서점에서 보던 책 제목들 보고도 혀를 내둘렀는데 현장에서 눈으로 보니 실감이 나네. ‘0세 교육의 비밀’, ‘0세부터 배우는 유아 영어’, ‘0세 교육 평생 간다.’ 이런 책들이 유아 코너 한편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더라니까. 그냥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하고 말았는데 이렇게 열기가 뜨거운 줄 몰랐어. 누가 그러던데 아이들이 선행학습 없이 초등학교에 가서 배우기 시작하면 이미 늦은 나이라고. 오빠가 아직 내 눈으로 보이는 우리 아이가 없어 뭘 모르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된 세상을 내가 이해 못 하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혼란스럽네.”


   잠시 휴식할 겸 아내와 벤치에 앉아 부스를 둘러보다 느낀 소감과 평소 생각해 왔던 교육관에 관해 먼저 말을 걸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주변 지인들이나 엄마 된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래. 책에도 나오잖아. 0세에서 3세가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어떤 책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적어도 6세까지는 매일 쉬지 않고 무엇이든 가르쳐야 한다고 나오고, 뇌가 말랑말랑한 상태, 그러니까 뇌가 더 자라기 전 영유아기 시절에 학습 환경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조금씩 노출을 해야 한다고 쓰여 있더라고.”


   “그래. 가르치고, 학습하는 것 좋지. 부모로서 교육 차원에 아이가 좋아하고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알려주고 가르치는 건 좋아. 조금 전에 말한 대로 3세 미만 아기에게 그 시기가 중요하다는 것도 이해해. 뇌 활성화 측면으로 자식, 부모 간 성장 시 유대관계, 친밀도 같은 것을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주며 아빠 엄마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들려주는 행동도 올바른 거라 생각해. 다만, 내가 꼬집고 싶은 건 그 목소리가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 같은 외국어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젖먹이 아기에게 영어 회화나 영어 동요를 꾸준히 들려주는 게 맞는 건가?라는 의구심이 생기는 거야. 주변이 외국어를 자주 사용할만한 환경이거나 원어가 가능한 가족이 집에 있다면 모를까. 너도나도 달려들어 어린이집,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가 이어지는 누리 교육까지 다른 아이와 비교해 가며 조금이라도 앞선 아이로 만들려는 것이 정상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거야. 정작 행복해야 할 시기에 아이 감정을 짓누르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강한 의문이 드는 거지. 계속 말하지만, 어른들의 목적달성을 위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오빠 말도 충분히 이해해. 그런데 요즘은 학교마다 다르긴 하지만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생각이나 의견을 문장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미리 한글은 떼고 보내야 한 대. 얼마 전에 애가 사립초등하고 들어갔다는 내 친구 지혜 알지? 걔가 초등학교 때 배울 줄 알고 그냥 보냈더니 담임선생님이 이미 배워온 것으로 간주하고 책 읽기나 받아쓰기를 바로 시작하는 바람에 애가 무척이나 당황했다는 거야. 그래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따라가야 하는 건 불가피하다고. 다들 한글이나, 영어 그리고 악기 하나 정도는 능숙하게 갖추고 시작하기 때문에, 같은 트랙에서 모두 동시에 달리기를 한다고 할 때 내 아이는 뒤에서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거야. 그런 상황을 어떤 부모가 만들고 싶겠어. 내 아이의 행복을 위한 길이 어떤 것인 줄은 잘 알고 있지만, 환경이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까 무리해서라도 조기교육을 하려는 거라고.”


   “말이 되나?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같은 영유아 교육기관에서 배우거나 스스로 독학을 해서라도 미리 깨우쳐야 한단 이야기인데 아직 영유아 교육이 의무가 아닌 국내 제도 내에서 왜 그래야 하지? 특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비용은 고사하고 몇 개월씩 줄을 서도 들어가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고 그만큼 수요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잖아. 더군다나 가정 내 여러 사정상 영유아 교육을 보낼 수 없는 경우도 많다고. 그런 상황에도 어떻게든 한글 하나 정도는 완벽히 읽고 쓸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놔야 초등학교에 들어가 다른 아이들과 출발이라도 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인데. 아. 너무 어릴 때부터 공평하지 못한 것 같다. 이제 시작하는 아이에게 출발부터 달라 저 뒤쪽 출발선에 서야 하다니. 내가 너무 옛날이야기 하고 있나?”


   “응 미안하지만, 오빠 너무 옛날이야기 하는 거야. 요즘은 알파벳이나 한글, 덧셈, 뺄셈 정도는 초등학교 가서 배우는 게 아니고 기본으로 익혀야 한다고 기본! 알고 가야 바로 수업에 들어갈 수가 있는 거야. 그래야 뒤처지지 않지. 모든 학부모가 오빠 같은 생각이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아. 다시 말하지만, 나라에서 정해놓은 제도에 맞게 따라가야 하는 건 기본이고 엄마 뱃속 태교 시절부터 hi! 하면서 영어로 인사한다고. 심지어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이름을 영어 이름과 같이 지어주는 작명소도 많아. 그렇게 이미 여러 고개를 넘어 여러 가지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여유롭게 시작하는데 오빠 말대로라면 우리 아이만 그제야 허겁지겁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 이미 반 바퀴나 앞서 뛰고 있는 친구를 따라가려니 얼마나 힘들겠어. 그래서 그러지 않기 위해 저렇게 부모들이 앞서 뛰는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벌써 한숨 나온다. 책도 그렇지만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나이가 어릴수록 아이의 인성이나 성향이 상당한 영향을 주는 시기이기 때문에 조기에 아빠와 엄마가 얼마나 함께 놀아주고 시간을 보내주느냐가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해 말하더라고. 그래 0세 교육이니 조기 교육이니 영유아 교육이니 이런 건 차치하더라도 이제 세 살 네 살 나이에 실컷 뛰어놀아도 부족한데 너무 이른 교육의 홍수에 떠밀어야 한다는 게 안타깝고 답답하다. 요즘은 영어도 베이비과정이 있다면서? 온라인특강이나 유튜브 교육도 하고 미국 교과서와 동일하게 배우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홍보하는 걸 봤어. 어떻게 보면 공교육 과정이 해답을 주지 못하거나 교육부의 원천적인 교육 시스템 자체 문제이기도 할 거야. 홈스쿨링이나 대안학교 같은 곳을 찾는 부모들이 늘고 있는 것만 봐도 그걸 반증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이렇게 일찍 교육에 매진하다 미래에는 의사, 검사, 변호사들만 천지에 널려있고 소위 SKY 출신들이 많아져서 그 외 대학이나 고졸 출신들은 사람으로 쳐주지 않는 건 아닐까? 그냥 꾹 참고 시대의 흐름에 맡겨야 하는 건가… 아무튼 이런 상황이 난 너무 싫다. 싫어.”


   “오빠 말처럼 아이 행복을 위해 열심히 놀아주고 아빠, 엄마와 이곳저곳 여행 다니며 추억을 많이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 배짱이 꼴 나는 게 불 보듯 뻔하거든. 그나저나 오빠 너무 심각한 거 아니야? 나중에 우리 아이 태어나면 잘 놀아 주기나 하셔. 나한테 독박 육아 시킬 거 아니지? 돈 많이 벌어오라고 안 할 테니까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많이 만들어주고 책도 자주 같이 읽어주고 잠도 재워주고 알았지?”


   “알았어. 알았어. 그건 약속할게. 하지만 남들처럼 조기교육! 조기교육! 노래나 부르지 마. 난 그렇게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나랑 안 맞아.”


   “흥! 과연 그럴까? 나중에 아이 친구들과 은근 비교하게 될걸? 두고 보자고.”


   한참을 아내와 교육관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아직 낳지도 않은 아이를 벌써 어떻게 키워야 하나 고민만 앞섰다. 현장에서 발 빠른 정보를 얻고 저렴하게 구매하려고 베이비페어에 온 거지만 더 답답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밝고, 건강하고, 웃음 많은 아이로 평범하게만 자라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이 평범함이란 것도 사실 너무나 어렵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늘져 어둡고 구불구불한 길이 아닌 밝은 빛을 따라 올곧은 길로 갈 수 있도록, 평평하지는 않더라도 요철이 되도록 적은 곳으로 다닐 수 있도록, 긍정적이고 좋은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그런 아이로 자라길 바랄 뿐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키울 수 있도록 노력은 해봐야겠지. 


   베이비페어에서 나오며 다양한 영어 교재와 교구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다 갑자기 현실적인 생각이 엄습했다. 돈… 많이 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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